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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WiredHusky 2025. 1. 12. 10:39

닌텐도는 정말 정말 신비한 회사다. 죽을 듯 죽을 듯하면서도 기적같이 살아나고, 그 방식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갈라파고스 같은 일본 문화의 정수를 심장에 박아 넣은 기업인데, 바로 그 고유함으로 세계에 족적을 남겼으니 정말 놀랍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레지널드 피서메이는 무너져가는 닌텐도에 입사해 제2의 전성기를 이끈 미국 법인의 사장이다. 마케팅 출신의, 대단히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인물로 그로스(growth)에 특화된 인재로 보인다. 침몰하는 배의 키를 맡기에는 제격이었던 셈!

 

 

사람들은 성공 신화의 뒤에 늘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고 믿는다. 완전히 틀린 믿음은 아니다. 닌텐도DS와 Wii의 전 세계적 히트에는 레지널드 피서메이, 이와타 사토루, 미야모토 시게루라는 삼위일체가 있었으니까. 세 사람은 의견이 늘 같았던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완벽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E3 쇼의 키노트를 기획하며 있었던 일이 이 추정에 아주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레지널드 피서메이는 세계 최대의 게임쇼 E3에서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레지라고 합니다. 제 임무는 경쟁자들을 박살 내는 겁니다. 또 제 임무는 그들의 명성을 끝장내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My name is Reggie. I'm about kicking ass. I'm about taking names. And we're about making games."

(p.184)

 

쥐뿔도 없었던 회사가 하기엔 지나치게 건방진 대사였지만 이것이 그대로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버렸다. 확실히 성공을 위해선 망상에 가까운 일도 자기만큼은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 같다. 늘 조심스럽고 우울해 보이는, 언제든지 깜짝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일본인은 많이 불편했겠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발언은 맨 마지막 문장 '그리고 우리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였다. 왜냐하면 이 대사의 초안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 '나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이런 공격성이 마뜩잖은 일본인인데, 게임 개발자도 아닌 마케터가 '나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니 사실관계조차 맞지 않는 이 말에 우리의 재패니즈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많은 우려와 반대 끝에 이 대사는 '우리'로 변경됐고 결국 전설로 남았다.

 

나는 이 '우리'에 속은 사람 중 하나다. 이 책의 제목이 '나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였고 지은이가 레지널드 피서메이였다면 내가 이 책을 살 일이 있었을까? '게임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에 '나의 임무'를 붙이는 건 이와타 사토루나 미야모토 시게루 정도나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닌텐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레지널드 피서메이의 자서전에 가깝다. 닌텐도는 무려 140페이지에 가서야 등장한다. 생생한 게임 개발 이야기는 마케터의 커리어에 섞여 풀이 죽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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