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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잘 모를거에요

WiredHusky 2013. 5. 22. 15:36




*스포일러가 암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병들고 싶은 자들만 읽으시오


한국인이라면 거의 동의하지 않겠지만 스콧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인들이 그 위대한 헤밍웨이 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소설이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이 그렇다.

그래서 이 작품을 영화로 보는것이 우리에겐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문학이야 언제나 번역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독서는 영화에 비해 집중과 노력을 요하는 행위니까. 확실히 대중 문화의 서식자들에게 영화는 책보다 더 효율적인 컨텐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이 현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원작에 본질적인 결함이 있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매체의 전환에서 오는 가치의 손실이 번역에 못지 않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관객은 왜 이 영화를 재미있다고 얘기 하는가?

디카프리오. 아무리 '위대한 개츠비'를 욕하고 싶은 사람도 감히 디카프리오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전세계 여성 관객의 심장을 폭파시킨 이 남자는 요절한 천재 리버 피닉스의 뒤를 잇는 금발의 미소년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금발과 미소년은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긴 하지만 진짜 배우로 거듭나려 할 때는 도리어 장애가 되곤 한다. 디카프리오도 '비치'나 타이타닉에 머물러 있었다면 타고난 재능이 도리어 자기의 발목을 낚아채는 진흙탕 속에서 힘겨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년이 됐고 더불어 배우가 됐다. 

개츠비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상류 계층의 고급스러움과 함께 때로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플레이 보이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만 실상은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인물로서 깊은 고뇌와 비밀을 표현해내야 한다. 그리고 고뇌를 연기하기 위해선 미간에 주름이 있어야 한다. 이 금발의 미소년이 대체 언제부터 주름을 갖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가졌고, 연기했다. 



바즈 루어만. 이 감독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데뷔했다고 믿는 사람에게 '댄싱 히어로'라는 영화를 상기시켜 주고 싶다. 1992년에 나온 이 영화는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춤 관련 영화 중 최고다. 그리고 이 작품이 바로 바즈 루어만의 데뷔작! 이후 개봉한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루즈, 오스트레일리아는 춤과 더불어 노래, 화려한 색채, 흥분의 도가니, 스타일리쉬한 연출이 가미되는데 그 수준으로 추측컨대 신은 바즈 루어만에게 춤과 노래를 카메라로 담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게 분명하다. 

개츠비의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파티, 날리는 꽃가루, 신나는 밴드와 춤추는 군중들, 화려한 쇼트와 현란한 커트! 그 위로 흐르는 21세기의 팝과 힙합. 그 절묘하게 편곡된 음악들과 함께 이 모든 흥분이 넘실넘실 춤을 춘다. 평소엔 책도 거의 안보는 위인들이 유독 영화를 볼 때 만큼은 내용이 없네 스토리가 엉성하네 하며 영화를 읽으려 드는데, 영화는 기본적으로 보는 컨텐츠 아닌가! 당신의 눈망울 위로 빨주노초파남보 화려하게 스쳐지나는 색채의 스펙트럼을 포착하라. 그 만화경 같은 잔상들을 즐기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 세상과 더불어 춤출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이 영화를 재미없다고 얘기 하는가?

왜 개츠비가 위대한지 모르겠다고? 정당한 의문이다. 순수한 사랑 어쩌고 하는 얘기는 영화 포스터의 광고 문구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개츠비를 순수하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개츠비의 부와 권력이 다른 속물들과는 달리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랑을 위해 성공했다. 그러나 이 순수함이 끝까지 살아 남기 위해선 데이지를 가만 놔뒀어야 했다. 그는 엄연히 유부녀이지 않은가? 톰 뷰캐넌이 먼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데이지와 개츠비의 불륜은 문제 될 것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한 걸 모두 되 갚아주는게 옳다고 믿는 사람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보복 살인, 보복 강간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당신은 결코 함무라비의 신봉자가 아니다.

비록 행위는 옳지 못하더라도 심정적으로는 이해될 수 있는, 개츠비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데이지와 함께 도망을 치는 것이다. 실제로 데이지는 '도망치고 싶다'고 말했다. 개츠비는 그 때 수단에 불과한 자신의 돈과 권력을 모두 버리고 데이지와 함께 도망쳤어야 했다. 개츠비는 여기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가 원한건 도망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건 과거를 바꾸는 것이었다. 과거를 바꾸다니, 과거를 바꾸다니!? 이 터무니 없는 망상은 위대한 개츠비를 '셔터 아일랜드'의 과대망상증 환자 '테디'로 전락 시킨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톰에 대한 사랑을 부인하라고 종용한다. 톰의 앞에서, 직접적으로. 망상은 결국 재앙을 부른다. 말 다툼, 숨길 수 없는 분노 그리고 사랑이라는 가면을 깨고 드러난 한 남자의 집착.



'당신은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전부 모아 놓은 것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오!'

꼬인 이야기는 닉 캐러웨이의 이 대사를 통해 개츠비의 가치와 영화의 주제를 선언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과정없는 선언은 빈 공간에 갇힌 메아리처럼 허망하고, 또 허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개츠비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과오를 죽음으로 갚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죽음은 톰과 데이지에 의한 것 아니던가! 두 사람이 직접 개츠비를 죽인건 아니지만 이 죽음은 데이지의 뺑소니 혐의를 개츠비가 대신 감수하고 톰이 뺑소니 피해자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완성된다. 톰과 데이지는 개츠비의 죽음이 근본적으로는 자기들 탓이라는걸 알지만 자신의 인생까지 망가지는걸 원치는 않기에, 진실에서 멀리 멀리 도망쳐 버린다. 이 때 관객은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눈물은 개츠비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연민이지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감동이 아니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가진 '영화적 속성'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한다. 또 관객들은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싫어한다. 이 말은 원작이 가진 주제에 근본적 흠이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감히 이 소설에 근본적 흠이 있다는 얘기는 못하겠다. 난 한 명의 위대한 소설가를 부족한 깜냥으로 제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확실히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어쩌면 순수한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 진부한 얘기가 된건 아닐까? '위대한 개츠비'가 20세기 미국 문학의 영원 불멸한 상징이 된 건 그래도 당시엔 순수함을 칭송하는 기조가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순수를 논하는건 바보나 멍청이들에게나 주어진 일이지 않은가?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이제 갓 사회 초년생이 된, 소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개츠비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자 초년생들은 개츠비가 멍청한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이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건 정말 멍청한 일이라고. 돈만 있으면 여자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나같으면 그 돈으로 미끈한 스포츠카를 산 뒤 하루에도 몇 명 씩 여자를 바꿔가며 흥청망청 살았을 거라고. 

위대한건 개츠비의 돈이지 그의 사랑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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