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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둘러싼 창과 방패의 대결 - 벤야민과 아도르노 본문
유배된 예술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머리가 콩코드르 광장 위를 구르고 있을 때 장전된 길로틴의 밑에선 예술의 머리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시민 혁명은 절대왕정을 붕괴시키고 귀족 중심 사회를 해체시켰다. 그동안 귀족과 왕궁의 후원을 받던 예술 또한 따뜻한 안식처를 강탈당한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부모를 잃은 예술은 이제 거리로 몰려나 정어리, 곡괭이, 밀 등과 경쟁하는 시장 경제의 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예술의 고객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바 졸부, 머저리, 교양 없는 인간들. 심지어 보들레르는 이런 부르주아 계급의 저급한 미적 취향을 일컬어 '개는 냄새나는 더러운 똥 통조림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좋아라 달려들지만, 정작 향기로운 향수를 주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냉담하게 돌아설 뿐이다'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상품인 주제에 고객을 경멸한다면 과연 누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술은 자유를 선언한다. 절대왕정에도 귀족에도 부르주아에도 봉사할 필요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도도한 선언. 그리하여 예술은 그 의미를 꽁꽁 감춘채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무대 위에선 모호한 의미와 추상적 이미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기 마련이고 말라버린 우물은 언젠가 빗물로 가득차기 마련이다. 예술이 떠나간 자리는 대중 문화가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20세기. 대량 복제 기술과 매스 미디어로 무장한 대중 문화는 예술을 영원히 유배시키기에 이른다.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이론과 설명을 낳는다. 20세기, 100년에 걸쳐 변할 것이 불과 10년만에 이루어진다는 이 격변의 시기에 대중 문화를 해부할 집도의로 점지된 것은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였다. 그러나 동시대에 살았고 같은 유대인이었으며 평생 학문적 교류를 그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이 대중 문화를 이해하는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아도르노는 대중 문화를 경멸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천박한 대중 문화를 경멸했다. 그는 이 천박한 대중 문화를 건전한 대중 문화와 구분하기 위해 '문화 산업'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대충 다음과 같다.
첫째, 대중 문화의 형성에 있어 그 수용자인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는가.
둘째, 대중 문화는 대중을 억압하는 체제 및 사유에 저항하는가.
따라서 문화 산업이란 이 두 가지 조건이 결여되어 있는 대중 문화를 뜻한다. 또 '산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대량 생산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생산된 문화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규모로 유통되는 것인데 똑같은 모양, 똑같은 맛에 자극적인 양념을 추가하여 보급되는 대중 문화는 결국 사람들의 미각을 마비시키고 만다.
미각이 마비된 대중의 틈에서 까탈스러운 입맛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당신이 예민한 미각을 유지하는 한 이마트에도 GS25에도 심지어 결혼식 뷔페집에서도 당신이 먹을 음식은 없다. 이 말은 남들이 입 안 가득 음식을 집어 넣으며 신나게 떠들고 있는 순간에도 당신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지옥같은 허기를 달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고자 한다면 엄청난 노력을 들이거나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까탈스럽게 굴지마 주는대로 먹으면 돼.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귓가에 바짝 다가온 끈적한 목소리는 농염한 손짓이 되어 당신을 유혹한다. 그리고 유혹은 언제나 승리한다. 이제 모든 대중은 문화 산업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 그 시스템을 비판하고 극복할 잠재력을 영영 상실해 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대중의 좀비화다. 이 때부터 시장과 각종 이데올로기는 사악한 양치기가 되어 뒤에서, 이 좀비 무리를, 막대기로, 이렇게 저렇게 쑤시며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간다.
<저항 할 것인가, 모른척 살아갈 것인가>
그러나 좀비 무리 속에서도 언제나 제정신을 잃지 않는 괴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의 음모를 간파하고 시장의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낸다. 이들은 빨간약과 파란약을 들고 다니며 '매트릭스'의 거짓을 까발리는 모피우스다. 덕분에 사람들은 대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우러나는 상큼하고 깊은 맛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섬뜩한 촌철의 묘를 보여준다.
아도르노는
예를들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당신에게도 시장은 무엇인가를 팔아야 한다. 그리하여 헐리웃에서는 체 게바라의 전기 영화가 만들어지고 대형 출판사는 두꺼운 양장본을 출간해 쇼윈도에 비치한다. 한편 Pop Music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MIC를 잡은 랩퍼들이다. 반항의 icon이자 대안의 상징인 이들의 앨범은 메이저 배급사에 의해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우리가 'MIC만 잡으면 나도 랩퍼'와 'Put your hands up'을 백만번 리피트 하는 동안 랩퍼들의 엉덩이 밑에선 수천만 달러가 수북히 쌓여 간다.
<힙합은 무죄인가?>
따라서 획일화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화 산업은 오히려 차이를 강조하고 부각시킨다. '혁명', '신개념', '새로운', '확 바뀐' 같은 형용사가 유난히 판을 치는 오늘날의 광고 문구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결국 문화 산업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이란 그 누구도 시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함정일 뿐이다. 그들은 대중의 취향을 촘촘히 분류하고 조직한뒤 그것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사악한 양치기들은 결코 무식하지 않다. 그들의 양몰이는 세련되고 우아하며 스리슬쩍 파고드는 소매치기의 손처럼 날렵하고 은밀하다.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은 대중 문화의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한 최초의 미학자였다. 그는 마르크스 주의자 답게 예술의 생산 수단의 변화에 집중했는데 여기서 그의 대표작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특히 벤야민은 '아우라(Aura)'라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도입하여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을 설명하려 했다.
발터 벤야민과 미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우라'라는 말은 한번 쯤 들어봤을것이다. 판타지 문학에서는 오오라라고 말 하기도 하는데 퇴마록에서 박신부가 사용하던 기술이 바로 이 오오라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설명하는 '아우라(Aura)'가 박신부의 '오오라(Aura)'와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세상엔 비유 혹은 그것을 체험했던 감상을 통해서만 설명 가능한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아우라 또한 이런 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아우라는 결코 언어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 해보자.
우리는 지금부터 모나리자의 작업이 막 끝나갈 무렵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공방으로 날아 간다. 모나리자는 오늘날 당신에게 어떤 미학적 충격도 주지 못하는 광고 속의 그림일 뿐이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다. 이 모나리자는 진짜기 때문이다! 자 이제 과감히 캔버스 앞으로 다가가 모나리자를 들여다보자.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오로지 '단 하나의' 모나리자가 예의 그 신비한 미소를 흘리며 당신의 눈을 바라 보고있다. 어떤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숭고의 물결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은가?
이처럼 아우라란 그 예술이 진품이거나, 일회적이거나 혹은 원본이라는데서 나오는 독특하고 신비한 분위기다. 그런데 이 아우라는 기술 복제 시대에 이르러 처참히 무너져 버리고 만다. 구글은 모나리자라는 검색어로 0.32초 만에 152만개의 복제된
이미지를 검색해 주고 집 앞 이발소의 달력에는 모나리자가 예의 그 오묘한 미소를 띄우며 낡아 빠진 면도날을 쳐다보고 있다. 모나리자는 도처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현대 예술의 종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요즘말로 간지. 영화 용어로는 포스>
예술은 이대로 영영 끝나버린 걸까? 그러나 벤야민은 바로 여기다 예술의 새로운 출발선을 긋는다.
아우라가 충만했던 시절의 예술은 종교적, 제의적 도구로 사용됐다. 예술 작품의 유일성과 숭고미는 종교와 제의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라가 붕괴된 이후 예술은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이 예술을 다시 고용한 것이 바로 정치다.
벤야민은 특히 러시아 민중 영화의 틈새에서 대중 예술의 정치화를 가늠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으로 대변되는 이 영화들에는 Continuity Editing으로 불리는 매끈한 숏(shot)전환이 없다. 오히려 숏과 숏을 과감히 충돌시켜 정서적 충격을 줘야한다는게 에이젠슈타인의 기본 생각이었다. 이런 충격을 통해 대중은 쉴새 없이 몰아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도 넋을 놓지 않고 언제까지나 깨어 있을 수 있다.
극장에 앉아 '전함 포템킨'을 보는 관객들은 오뎃사 계단을 줄지어 내려오는 짜르 군대의 흉폭함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지배 계급의 잔인성을 목격한다. 군중을 향해 떨어지는 총알과 불뿜는 대포들은 단지 영화 속 등장 인물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상의 충격은 곧 관객의 분노로 이어진다. 그리고 관객은 이 분노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깨닫는다.
<사자 석상을 담은 3개의 Shot은 차례대로 이어지며 거칠게 충돌한다. 잠들어 있던 사자는 기립하고 이것은 민중의 혁명, 프롤레타리아의 자각을 의미한다>
벤야민의 헛수고
그렇담 누가 옳은 것일까?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차 대중 문화를 쓰레기 취급했던 아도르노일까? 아니면 그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잠재력을 발견한 벤야민일까? 오늘날을 두고 보면 확실히 벤야민 보다는 아도르노의 음울한 예언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의 정치화가 대중을 계몽할 수 있다지만 계몽에 앞서 시도된 것은 파시즘의 세뇌와 선동이었다. 오늘날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TV에서 양산되는 드라마는 언제나 막장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질주하지만 시청률은 끊임없이 고공행진을 한다. 영화 예술의 진짜 가치? 그건 컨텐츠의 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멀티플렉스의 배급망에서 나온다. 인터넷? 그곳은 가면을 쓴 괴물들이 모여 흉계를 꾸미는 음침한 쓰레기장이다. 그곳에선 근거없는 소문이 숭배되고 진실은 항상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버린다.
사람들은 여기서 와 하면 따라서 와하고 저기서 우 하면 따라서 우 한다. 생각하는건 피곤하다. 헛소리는 집어치는 것이 좋다. '좋은게 좋은거'라는 미덕은 오늘날의 세상을 지배하는 암묵적 동의이자 대중이 유일하게 만장일치를 이룬 사회적 계약이다.
도대체 어디에 희망이 있다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벤야민은 분투했지만 헛수고였다. 아도르노가 옳았다. 우리는 천박하다. 이제와서 바꾸기엔 세상이 너무 단단하다.
에필로그
광우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 온 국민을 촛불 시위에 투신하게 만든 것은 대중 문화의 힘이었다. 특히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이 YouTube에 공개되고 디지털 카메라로 실시간 중계가 시작되자 시위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미친듯이 타올랐다. 이 와중에 누구보다도 즐거워하며 이 사태를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했던 중년 남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발터 벤야민을 전공한 진중권이었다.
시위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그의 모습에선 100분 토론에서 볼 수 있었던 재수없는 표독스러움이 없었다. 그는 있는대로 흥분해 사태를 완전히 즐기고 있었다. 지극히 대중적인, 천박한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번져가는 진보의 물결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믿어왔던 발터 벤야민의 생생한 재림을 떠올렸으리라.
<마그리뜨 作>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권력은 언제나 고개를 숙이며 굽신댄다. 그러나 깜빡 잠이 든 순간 그것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어느의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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