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PXsociety

잠_하루키의 불안과 초조, 그리고 공포 본문

잠_하루키의 불안과 초조, 그리고 공포

WiredHusky 2016. 12. 25. 13:53





주인공 '나'는 평범한 주부다. 꽤 잘나가는 치과 의사 남편과 예쁜 아들이 있다. 아침에 둘을 보내고 나면 폐차 직전의 오래된 차를 끌고 나가 쇼핑을 하기도, 수영을 하기도 한다. 삶은 평화롭다 못해 단조롭다. 그런데 어느날 그 평화와 단조로움 속에서 뭔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걸 발견한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는 성가신 움직임. 그 움직임을 자각한 순간 문득 한 의문이 찾아든다. 나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 어쩐지 삶에 내가 끼워 맞춰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커지는 불안과 공포. 그렇게 불면의 밤이 시작된다.


'나'는 십칠일 째 잠에 들지 못한다. 불면이라고는 하지만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더 생산적이 된 것이다. 일상에 묻혀 새카맣게 썩어가던 자아를 마주한 이후 그녀의 마음 속엔 두 번 다시 감지 않을 어떤 눈이 번뜩 떠졌다. 쉴새 없이 정신으로 쏟아지는 자각의 향연. 이제 나는 평화롭기만 한줄 알았던 일상에 숨은 오물들을 발견해 나간다. 이런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남편은 고요히 잠들어 있다. 성실과 선함이 가면을 벗고 무심함을 드러낸다. 일어나 아들의 방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서 미지의 불쾌함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불쾌함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그것은 남편과 아이를 이어주는 저주 받은 피의 흔적이다. 아들과 남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서로 닮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녕 내가 사랑하고 지켜온 것들인가. 나는 이제 무엇과 함께,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결코 잠에 들 수 없다. 잠들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루키가 이 소설을 쓴 건 1989년 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라는 두 편의 장편 소설이 유례없이 큰 성공을 거둬 전업 작가로 뛰어든 상태였다. 하루 종일 위스키 바를 운영한 뒤 밤늦게 부엌에 앉아 소설을 쓰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은행 잔고엔 터질듯이 많은 0이 새겨져 있다. 세상은 하루키 신드롬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부와 영광이 작가로서의 하루키가 가져왔던 타이트한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취미로 소설을 쓰던 시절과는 다르게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커지는 인기와 더불어 쓴소리도 늘어난다. 저주에 가까운 평을 듣다보면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해도 뒷골이 땡기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똑같은 저주를 퍼붓지 않고는 온 몸이 찢어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시간이 흘러 분노와 흥분은 가라앉지만 마음 속엔 지워지지 않는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상한 회의와 불안도 찾아온다. 내 성공은 과연 나에게 합당한 것인가. 작가로서의 미래, 개인으로서의 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세상은 변함없이 똑같이 서 있는데 어쩐지 나만이 전혀 다른 세상에 내쳐져 홀로 걷는 것 같다. 


하루키는 <잠>을 썼을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도무지 소설을 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작가로서, 개인으로서 힘든 일이 연달아 일어났고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마음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잠>의 '나'가 불면의 밤을 보내듯 하루키도 침묵의 날을 보낸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하루키는 어느 따뜻한 봄날, 창 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마치 토해내듯,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잠>에는 그러한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