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PXsociety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_시리 허스트베트와 폴 오스터 본문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_시리 허스트베트와 폴 오스터

WiredHusky 2017. 5. 7. 11:43





이 책은 두 가지 면에서 당신의 흥미를 끌 것이다. 첫째는 저자인 시리 허스트베트가 폴 오스터의 아내라는 것. 둘째는 이 책의 제목이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이라는 것.


이 두가지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냥 이런 책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 주길 바란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라도 관심이 있다면 몇 일을 투자하여 이 책을 독파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둘 모두에 관심이 있다면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제목에 반했다. 원제는 <Blindfold>지만(눈가리개) 어떤 천재 번역가가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이라는 제목을 붙여놨다. 제목이 이렇다면 우선 잡고 봐야 한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된통 당한 적은 있지만 이건 순수 문학이니까, 황망한 말장난은 아닐 것이다. 예상대로 첫 작품을 읽는 순간 놀라버렸다. 폴 오스터를 연상케하는 환상과 미스테리, 스릴러의 절묘한 배합. 나는 그제서야 이 책의 맨 앞 장에 써 있던 글귀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폴 오스터를 위하여'. 시리 허스트베트가 그의 부인이라는 사실도 그때서야 생각났다.


독서는 더더욱 탄력을 받았다. 그 소설엔 명백히 폴 오스터를 연상케하는 신비의 남자 모닝이 나온다. 여자 주인공 아이리스는 분명 시리 허스트베트 자신이리라. 남자는 여자에게 정체 불명의 물건, 이를테면 쓰다 버린 솜뭉치, 거울, 장갑 등을 주며 그 물건에 대해 묘사해 올 것을, 하지만 글이 아닌 육성을 이용해 녹음해 올 것을 요청한다. 물건은 죽은 소녀의 것이었지만 그 소녀가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모닝과는 어떤 관계였는지는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규칙은 단 하나. '이것은 망자의 물건입니다'로 녹음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해오면 돈을 주겠다는 게 모닝이 말해주는 전부였다.


아이리스는 이상하다 못해 제정신이 아닌 이 프로젝트에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모닝의 요구는 황당했지만 분명 합당한 면이 있었다. 그 이상한 요구들은 사물이 거울, 솜, 장갑 같은 추상성, 또는 백혈병으로 죽은 14세 소녀의 소지품 따위의 구체성에 오염되기 전, 그러니까 인간이 사물에 뭔가를 부여한 의미가 아닌 사물이 직접 말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발굴해 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저마다 다른 사연과 이야기를 가진 사물은 인간이 붙인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향기도 맛도 나지 않는 무기물로 전락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너무 구체적인 사실 또한 수 많은 이야기를 하나로 축소시키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 거울이 백혈병으로 죽은 14세 소녀 메리의 것이라는 말을 해주는 순간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우리의 귀는 그 구체성이 구축한 특정한 이미지에 막혀 완전히 다른 얘기를 전하는 거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게 폴 오스터가 시리 허스트베트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것은 폴 오스터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글쓰기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말랑말랑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아이리스는 모닝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죽은 소녀의 정체를 파헤치려 한다. 마침내 그녀는 소녀가 모닝의 아파트에서 살해당한 여자라는 걸 알게 된다.


이제 작업은 끝났다. 여자는 더 이상 사물이 말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건 살해당한 여자와 그녀의 몸에 칼을 찔러 넣는 모닝의 모습 뿐이었다. 수 만, 수 십만의 가능성으로 들끓던 의미의 용광로는 아이리스의 추측에 의해 잔인하게 박제된다. 거기선 이제 단 하나의 이야기 말고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이 글쓰기 방법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글쓰기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 속에서 인물은 행동하고 사건은 가지를 뻗는다. 작가는 수 많은 가지를 하나로 모아 결론에 이르고 독자는 바보같은 모범생처럼 고개를 숙인 채 그 길을 걷지만 거기엔 분명 다른 결말도 존재했을 것이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말은 다른 많은 것들을 버린다는 말과 같다. 버려진 이야기를 모으는 일, 이야기를 버리지 않고 구석구석 쌓아두는 일. 폴 오스터의 세계가 그토록 모호한 이야기와 환상으로 채워져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소설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싶어 미친듯이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소설은 문득 56p에서 끝나버린다.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모든 게 모호한 상태로.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4개의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이었던 것이다. 견딜 수 없던 호기심은 허무로 또 분노로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떤 불가능한 작업에 대한 열의로 변해갔다. 그것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 어쩌면 나는 아이리스의 바보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소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모호한 것들을 찢어버리고, 끝맺지 않은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