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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_하루키의 이야기

WiredHusky 2017. 6. 25. 10:53





에피파니의 작가답게 하루키의 소설엔 갑작스런 차원의 전환이 자주 일어난다. 정체 불명의 도인에게 도움을 받거나 색채가 없는 인간과 만나는 건 일도 아니다. 어느 날 하늘엔 두 개의 달이 뜨고, 공원 벤치에 앉은 샌더스 대령이 말을 걸어오기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루키의 이야기를 가볍다거나, 키치적이라거나, 유치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루키만큼 이야기의 맛을 잘 아는 작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 세계를 통 털어도 그렇다. 만약 그가 정말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순수 문학계에 있어선 획기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천상에서 군림하던 예술을 땅 위로 끌어내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상태가 오히려 이야기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한다. 이야기는 본래 대중의 것이었다. 재고 자시고 할 게 없는 것. 그랬던 게 하늘 높이 떠올라 쨍쨍한 빛을 쏘아대고 있으니 누가 그걸 올려다 보겠는가. 사람들이 바라보는 건 정오의 태양이 아니라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오렌지 빛 석양이다. 문학이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소설가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재미 있는 소설을 읽고 싶을 땐 언제나 하루키의 책을 집는다. 심지어 이 책의 제목은 <도쿄 기담집>. 아예 이야기를 전면에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책장을 펼치는 순간 딱 감이 왔다. 탄산수처럼 경쾌한 문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나간다. 그런데 이건 이상한 일이다. 5편의 단편 소설 모두 아주 커다란 상실에 대해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감정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사람들은 쉽게 울거나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소설은 상실에 대한 공감을 미끼로 억지 눈물을 짜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루키의 하드보일드다. 하루키는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눈물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손 쉽고, 또 실제적이지도 않다. 소설 속 인물들은 슬퍼한다기 보다는 당황한 듯 보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아들의 죽음, 사라진 이름, 가족과의 단절. 그들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아본 상실인 것이다. 위로의 목소리는 공허한 가슴을 울릴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데도 어디선가 그치지 않고 마음의 파문이 인다. 하루키는 이러한 상태에 직면한 사람들이 속절없이 다가오는 하루 하루를 어떻게 소화시켜 나가는지를 그려보인다. 그 정체 불명의 감정 덩어리를 조금씩 조금씩 잘라 반복되는 일상에 섞어 넣는 모습을.


하나레이 해변의 사치는 이러한 모습의 정수를 보여 준다. 사치는 몇 년 전 남편을 여의고 외동 아들과 살고 있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 도중 상어의 습격을 받아 죽어버린다. 경찰의 시체 안치소에서 다리 하나가 잘린 아들의 얼굴을 확인한 사치는 아들을 화장한 뒤 그가 머물던 하나레이 해변으로 와, 그곳에 눌러 앉아 버린다. 도대체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아들을 집어 삼킨 해변을 찾아온 것일까? 몇일 전 서퍼 하나가 상어에 습격 당해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서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파도를 탄다. 그들에게 아들의 죽음은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그 위험을 능가할 뭔가가 저 바다 속에 감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모래 위에 앉아 아들을 집어 삼킨 바다와 끊임없이 파도를 향해 나아가는 서퍼들을 바라본다. 부서진 파도가 모래와 섞여 하나가 되듯이, 일상에 흡수된 슬픔은 바다에 부딪혀 잘게 쪼개진 햇빛처럼 흩어져 간다.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를테지만 나는 하루키의 책을 들고 후회해 본 적이 거의 없다(에세이는 논외로 하자). 특히 대단한 문학적 야심없이 써내려간 소설들은 더더욱 그렇다. 온 힘을 다해 장편을 쏟아낸 뒤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듯 써낸 단편집. 나에겐 오히려 이런 소설들이 보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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