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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범람_대단한 악도, 대단한 탐정도, 대단한 사건도 없이 본문

어두운 범람_대단한 악도, 대단한 탐정도, 대단한 사건도 없이

WiredHusky 2017. 10. 22. 10:08





<어두운 범람>은 일본 미스테리의 지평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다. 기괴, 환상, 공포 뿐만이 아니라 실생활 곳곳에 스며든 미스테리까지. 미스테리의 주인공이 평범한 백수에서 프리랜서 탐정까지 될 수 있는 나라. 이것이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의 미스테리다.


파리 남자가 가슴을 밀어 끈적 끈적 부풀어 오른 시체 위로 탐정을 쓰러뜨렸을 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대단한 야심도 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문장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야한다는 사명감을 비웃듯 쿨하고 멋졌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작가는 언제나 믿을만하다. 과잉은 늘 모자람만 못한 법이니까.


나는 이런 류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상 망측한 트릭을 혐오해왔다. 범죄를 위한 루브 골드버그 기계.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나 복잡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안다. 좋은 해결책일수록 간결한 법이다. 범죄를 위해 온갖 요란한 트릭을 끼워맞춰 MBC의 <서프라이즈>보다 더 서프라이즈 같은 짓을 벌이면 민망하기만 하다. 이런걸 가지고 천재적이니, 대단한 반전이니 하는 평가가 사라져야 진짜 리얼한 추리, 미스테리 장르가 탄생할 것이다.


알라딘의 소설MD 최원호님은 <어두운 범람>을 '악에게 정서적으로 침범당할 여지가 없는 깔끔한 세계'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이 책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대단한 악도, 대단한 탐정도, 대단한 사건도 없다. 책장을 연 순간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타 목적지에 내려 화창한 가을 낮의 거리를 걷듯 자연스럽게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정황 묘사는 간결하고 악인의 동기와 심리를 깊숙히 파헤치지 않는다. 그러니 조커에 빠진 히스 레저가 될 위험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를 피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 가볍달까? 매니아들은 이런건 미스테리가 아냐 진짜는 이 쪽이지, 하며 어둠의 오오라가 가득한 숨막히는 검정색 책장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다고. 하지만 계속 읽어나가다보면 그런건 시시해져, 결국엔 이리로 올 수 밖에 없다니까.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경험해본 나로서는 이것을 취향의 문제라고 정의할 수 밖에 없다. '본격' 미스테리 장르가 내려주는 어둠의 세례를 받기엔 내 마음이 아직도 순수한걸지도.


<어두운 범람>을 심야의 미스테리 단편 드라마로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부담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노곤노곤 잠이 오는 몸을 소파에 눕히고 TV를 튼다. 지금은 금요일 밤. 이 기쁜 밤이 감은 눈 뒤로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잠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튼 TV엔 따뜻한 미스테리 단편 드라마가 나온다. 프리랜서 탐정 시리즈다.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뭐였더라? 에피소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 이걸 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두어번 하품을 하는 사이에 이야기는 끝났고 잔잔한 엔딩 타이틀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주도 수고했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힘찬 다음주를 기약하려는데, 나는 이미 고요한 밤 공기를 덮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읽고 이처럼 꿈같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이 책과 비슷한 느낌의 책을 꼽자면 단연코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선들이 떠오른다. <음의 방정식>이나 <맏물 이야기>. 두 책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어두운 범람>을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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