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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_잭 테일러를 불러, 지금 당장 본문

빛 혹은 그림자_잭 테일러를 불러, 지금 당장

WiredHusky 2017. 10. 29. 11:12





에드워드 호퍼를 알게 된 건 <밤의 파수꾼> 덕분이다. 책 표지에 그의 그림이 있었고, 그 속에 켄 브루언의 소설이 있었다. 그 둘이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됐음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때부터 느낀거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엔 뭔가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작가 자신은 엄연히 형식(style)을 고민하는 스타일리스트로서 그런 말을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객의 심상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모여든 것 아니겠는가.


<빛 혹은 그림자>는 미국 범죄 스릴러의 거장 로런스 블록의 머리 속에서 처음으로 발아했다. 그 자신이 굉장한 호퍼의 팬이기도 했던 블록은 이 그림들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보내 이야기를 하나씩 얻어올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빛 혹은 그림자>는 일종의 팬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도발적 주문을 수용한 작가의 면면을 보면 팬픽이라는 말이 궁색해지는 건 사실이다.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에서 범죄 소설의 대가들, 그리고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롤 오츠까지. 골탕먹일 생각으로 날린 강서브에 그들은 날카로운 서브 리턴으로 응수한다. 그들이 날린 공은 유유히 코트 위를 날아 날카롭게 코너를 찌른다.


솔직히 모든 소설들이 다 재미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눈에 띄었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마이클 코넬리, <11월 10일의 사건>의 제프리 디버, <음악의 방>의 스티븐 킹, <사건의 전말>의 리 차일드. 마이클 코넬리와 제프리 디버, 리 차일드는 설명이 불필요한 '범죄 카르텔의 수장'들이고 스티븐 킹은 인간 세계에 현현한 사탄의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공포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는 남자다. 호퍼의 그림이 가진 기괴한 우울과 어둠을 이들보다 더 잘 표현해낼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종이 위를 쏜살같이 헤엄쳐 나간다.


어깨에 힘을 쭉 빼고 써내려간 듯 경쾌한 단편들은 그들이 왜 대가인지를 증명하는 징표와도 같다. 아니 어쩌면 이 짧은 이야기들이야 말로 그들의 대표작보다 더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핵심인지도 모른다. 특히 스티븐 킹의 <음악의 방>을 보면, 평소 그의 중장편에서 보이는 쓸데 없는 군더더기가 모조리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언젠가 그의 글을 통해 나는 스티븐 킹이 단편 소설을 일종의 미숙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단편은 자신이 원하는 걸 모조리 쏟아 넣기엔 불완전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애를 써 적어 넣은 소중한 것들이 사실은 다 불필요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음악의 방>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제프리 디버 또한 마찬가지였다.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본 콜렉터>로 잘 알려진 유명한 불구 형사 링컨 라임 시리즈의 주인이 바로 제프리 디버다. 하지만 그의 장편들은 어딘가 유치한 구석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현실감 없는 범인들, 예측 가능한 반전, 너무나 천재적이라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는 형사까지. 그런데 그의 이야기에서 링컨 라임을 지우고 나니 오히려 긴장감 넘치는 소품 하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 차일드는 영화 <잭 리처>가 그의 커리어를 모조리 파괴할 정도로 엉망이라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선뜻 책을 들기 쉽지 않은 작가였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읽고 나니 잭 리처에게도 한번쯤 온정의 손길을 내밀어 줄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 머리 속에서 톰 크루즈를 지우고,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 잭 리처를 펼쳐든다. 실패할 확률은 높아보이지만, 어쨌든 경험이란 그런 것이니까.


이 단편선에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켄 브루언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건 모두 그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 같은 미국놈들. 진정한 대가 없이 마스터 피스를 만들려 하다니. 그 무모함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 켄 브루언의 소설이 딱 1,000자만 들어가 있었어도 난 별 다섯개를 줬을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골웨이의 뒷골목. 회색 구름 뒤에 가려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빛. 그 그림자의 왕국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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