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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WiredHusky 2021. 2. 21. 11:18

팔곡 마을에 거주하던 노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팔곡은 이름 그대로 8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마을이다. 내륙으로 이어진 길은 크게 돌아가야 하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천혜의 밀실이다. 마을 이름부터 소년 탐정 김전일을 배경을 연상케 한다.

 

노인들의 실종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우체부였고 그가 관할 파출소에 신고해 조사가 시작된다. 썰렁한 마을엔 공포가 깔리고 이장의 집에 누워 있는 옥수숫대는 그로테스크를 더한다. 호들갑을 떨며 이상한 집념을 발휘하는 우체부와 달리 파출 소장 박 경위는 의심과 수긍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노인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꼭 사건으로 연결될 합리적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노인들이 단체로 배를 타고 나간 흔적은 없지만 육로는 막히지 않았다. 시골 노인들이 흔히 그러듯 관광버스를 전세 내 단체로 여행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 이장의 자녀와 연결이 됐지만 그의 대답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는 없다. 잠깐 다녀오는 여행을 부모가 자식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식이 모른다고 해서 단체 여행이 실종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그러나 박 경위는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을 감지한다. 우체통에 가득 찬 웰다잉협회의 우편물. 늦은 시각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 시청한 웰다잉협회의 홍보 영상. 그리고 그 영상을 본 뒤 물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려 한, 자기 자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일련의 경험은 박 경위의 기억 속에서 팔곡 마을의 과거를 끌어올린다. 팔곡은 장수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그걸 축하하기 위한 잔칫날, 노인들은 박 경위가 배 안에서 본 웰다잉협회의 영상을 단체로 시청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 하나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모호한 단서들과 드문 드문 떠오르는 기억, 텅 빈 마을이 무거운 안개처럼 깔리며 긴장감을 조여 온다. 그리고 마침내 피가 폭발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힘을 잃고 급속도로 하강한다. 짙게 깔렸던 안개는 순식간에 나타난 햇빛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증발해버린다. 여기서 자초지종을 모두 떠벌이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삼가겠지만 뒤틀린 사상에 경도된 어떤 단체가 등장한다는 것만 알아두자. 이야기는 논리적 매듭을 짓기를 포기한 채 이 단체에 무소불위의 힘을 부여한다. 때맞춰 경찰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며 정체를 밝힐 유일한 단서를 놓쳐버린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이 구절을 읊을때마다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는 비밀 단체의 보스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의도는 어슴프레 짐작하지만 방법이 그것뿐이었는가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도입부가 너무 기대감을 높인 탓일 수도 있다. 뭐가 문제였는지 이야기는 장르 소설에서 급격히 유턴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질주한다. 짙은 스키드 마크. 매캐한 고무 탄내.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가 묻고 싶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이 길은 어디로 향하는 길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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