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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경비원의 일기

WiredHusky 2021. 2. 28. 15:17

정지돈의 소설들은 좀 긴 잡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득문득 위트와 유머가 번뜩이고, 어려운 내용은 하나도 없다. 특기할만한 서사가 없기에 소개하기도 좀 애매한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야간 경비원들이 몇 명 등장하고 그중 하나가 쓰는 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서사가 파괴된 실험적 소설을 읽고 나면 대개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1. 이게 소설이야?

2. 내가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3. 음... 그렇군

 

1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1.1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

1.2 정말 대단히, 순수하게, 진심으로 스트레이트한 성격을 가진 사람

 

이들은 블랙 유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풍자나 해학, 한두 번 꼬인 시니컬한 표현에 뚱한 표정을 짓는다. 쉽게 말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고 우리 세계는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도 정상 궤도를 질주한다. 스트레이트 하게, 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

 

2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 읽기에 열심히고 거기서부터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들이다. 활자가 인쇄된 종이 무더기에 무의식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며 마음이 무언가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늘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냥 먹고 끝내면 될 일인 평양냉면을 그 유래부터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테넷>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몰랐던 소름 돋는 복선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끈덕지게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음모론에 쉽게 빠지거나 간혹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대체로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친근하게 '오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권위와 정돈된 이론에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다. 세상에 대해선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도 사고는 꽤 열려있는 편이다. 이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음... 뭐 그냥 그런 거지' 라거나 '네가 본 대로 이해하면 돼' 같은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3.1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진정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

3.2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

 

나는 한때 2에 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게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해석을 포기한 채 그냥 3-2처럼 살기로 했다. '살기로 했다'라고 말하면 마치 내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능력에 의한 것이니 그냥 3-2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당신이 기대하며 찾았을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해석' 같은 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이 문학적으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정지돈의 소설들이 꽤 재밌다. 고르라면 장편보다는 단편인데, 처음 읽은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워낙에 재밌게 읽은 탓도 있고 잡담과 농담은 늘 길이와 재미가 반비례한다는 지론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론은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상당한 경험의 축적으로 귀납된 판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자, 요약하면 2나 3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무리 없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본인이 1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도 경험이지, 도전! 하는 괜한 의욕은 접고 쿨하게 건너뛰기를 추천한다. 세상엔 읽어야 할 게 차고도 넘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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