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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iredHusky 2022. 4. 17. 09:01

기묘한 이야기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분류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매우 정치적인 동시에 개인적이고, 에세이면서 과학책이고, 전기이면서 미스터리 스릴러 기도하다. 틀에 매이지 않는 이 책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유유자적 고정관념의 바위를 피해 다니며 자신만의 독자적 장르를 만들어간다. 정말로 독특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데이비드를 빼고 보면 마이클 조던의 별칭인가 싶을 정도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이 남자는,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 스탠퍼드의 초대 학장이다. 물론 당시의 스탠퍼드가 지금 같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설립자는 캘리포니아에서 매우 수상한 방법으로 떼돈을 번 부부였고 대학을 설립한 취지에도 약간 구린내가 풍겼다. 심지어 남편 릴런드 스탠퍼드가 사망하자 아내 제인은 스탠퍼드 대학이 강신술에 대한 과학적 연구 같은 분야로 확장해나가길 원했다. 제인은 과학자들이 대기 중의 X선을 활용하여 망자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열어주기를 요구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래도 과학자였다. 제인의 생각을 쓰레기라고 치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든 조던은 물고기 분류에 관한 한 미국 일인자였고 그가 세계에서 최초로 발견해 명명한 종들만 모아도 대학 연구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이 관심의 충돌은 이 책을 돌연 미스터리 스릴러로 이끄는 복선이 된다.

 

 

이 책의 줄기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생애다. 일종의 전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저자 룰루 밀러는 불행했던 개인사를 중간중간 끼워 넣어 자신이 왜 조던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됐는지를 밝힌다. 밀러가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조던이 평생을 놓지 않았던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였다.

 

조던은 강신술을 과학이라 믿는 무지한 고용주와 함께 일하면서도 자기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사나이였다. 가정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두 번째 부인과는 궁합이 잘 맞았지만 사랑했던 자식들을 불운한 사고로 잃었다. 치명타는 1906년 캘리포니아를 강타한 대지진이었다. 그 끔찍한 지진은 조던이 30년 동안 일군 업적을 단 몇 초만에 박살 내버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절망에 사로잡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대사건 앞에서 조던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는가? 그는 부서진 연구실로 달려가 에탄올과 시체 냄새를 헤치며 터지고 찢어진 물고기 표본들을 손에 쥐고 다시 그 위에 이름표를 꿰매 넣었다.

 

조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좌절과 분노를 어떻게 제압했을까? 그에겐 감정이란 게 없었던 걸까? 그릿(Grit)이라고도 부르는 이 근면 성실은 조그만 바람에도 휘청이던 삶을 살았던 룰루 밀러에게 성배와도 같았다. 어떻게 하면 조던처럼 살 수 있을까?

 

감동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흔하고 뻔뻔한 아메리칸 성공 스토리 기도 한 이 책은, 그러나 종반에 이르러 눈에 띄게 궤도를 이탈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이 되어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 순간 사소하고 같잖았던 이 이야기는 인류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힌트는 제목에 있다. 마지막 문장을 다 읽고 나면 이 모든 게 페이크 다큐는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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