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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을 회상하며

WiredHusky 2022. 9. 11. 09:18

20대 초반에 나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에 빠져 다소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빛이 들지 않는 구석진 서가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질릴 때까지 책을 읽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스스로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된 이후에는 더 다양한 작가에 탐닉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포함된 전쟁 3부작을 읽은 뒤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책에 빠졌고 우연히 극장에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뒤에는 코맥 매카시의 번역서를 모조리 사다 읽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도 비슷했다. 나의 존 르 카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끈 이론에 빠져 <우주의 구조>까지 단숨에 내달렸고 이후 그가 쓴 책이라면 따지지도 않고 집어 들었다. 내 서가의 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브라이언 그린이다. 미쳐버릴 정도로 좋아했지만 번역서가 거의 없거나 작품 자체가 많지 않아 몇 권의 책으로 그친 작가도 있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와 <밤의 파수꾼>의 켄 브루언이 그렇다. <밤의 파수꾼>을 펴낸 랜덤하우스 코리아의 편집자를 만나면 나는 언제 어디든 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내게는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가 있다.

 

썼던 글을 뒤져보니 내가 이 새로운 신을 마음속에 영접한 건 2010년에서 2011년 사이였던 것 같다. 첫 책은 <제5 도살장>이었다. 거의 1~2주 간격으로 커트 보네거트의 책이 올라온 걸 보면 심각한 중독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도저히 잊으래야 잊을 수 없고 떨쳐낼 수 없는 절대자.

 

한창 소설을 쓰던 시기에 글이 잘 풀리지 않고 벽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들면 <타임퀘이크>를 꺼내와 필사를 하곤 했다. 그의 글을 옮겨 적는 동안엔 아무 생각도, 아무 걱정도 내 마음을 넘겨보지 않았다. 딩동댕, 딩동댕~

 

 

주니어는 1922년에 태어나 2007년에 죽었다. 그의 말마따나 너무 오래 살았고 여기저기 싸질러 놓은 글과 말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살아생전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작가는 죽고 난 뒤 남겨진 이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주고받은 편지를 공개한다거나 미발표 원고 또는 연설문을 엮어 책을 내는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이런 걸 너무 끔찍하게 여겨 원고를 전부 불태우거나 공개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재치 넘치고 유머러스한 이 할아버지는 그런 유언을 남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크 보네거트는 주니어의 아들이었고 그 역시 작가였다.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얼마나 컸을지 이해하고, 주니어의 팬으로서 그의 글을 한 문장이라도 더 읽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겟돈을 회상하며>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주니어는 글쓰기로 따지면 뚜벅이 중의 뚜벅이였다.

 

아버지는 고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셨다. 고개를 앞뒤로 까닥거리며 방금 쓴 것을 거듭 웅얼거리고, 손짓을 해가며 높낮이와 리듬을 바꾸었다. 그러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몇 자 적지도 않은 종이를 타자기에서 조심스레 빼낸 뒤, 구겨서 던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p.7)

 

그런 작가에게 스스로 퇴고를 마치지 않는 글을 세상에 내놓는 건 벌거벗은 몸으로 타임스 스퀘어를 달리는 것보다 끔찍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 마음을 가장 흔든 건 아들 마크 보네거트가 쓴 서문이었다. 그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말린 꽃처럼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떠난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그를 회고하는 것이 이토록 따뜻하고 충만한 일이라는 걸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의 추모는 거기서 끝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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