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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리터러시 본문
우리에게 중국은 어떤 의미일까? 전근대와 근대의 수백 년 간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었고, 중화의 본토였으며, 사대의 대상이었다. 대중화가 북방의 유목민족에게 완전히 패해 멸망한 뒤에도 그 주종의 관계는 끝내 살아남아 오히려 신하가 주인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소중화에 갇히게 되었다. 그 뿌리가 너무 깊었는지 내 윗세대는 확실히 중국에 대한 모호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이색적 풍광을 끝도 없이 내놓는 광활한 대지, 춘추와 전국을 수놓은 철학자, 화산과 곤륜을 지배한 강호인의 향연.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고 최근엔 문화 분야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이 관계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요즘 사람들에게 중국은 모든 분야에 짭퉁이라는 독극물을 풀어놓은 파렴치한 나라이자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미개한 민족, 질병을 퍼뜨리고 인권을 탄압하는 비윤리적 독재국가에 불과하다.
정치, 문화적으로 여전히 후진 나라가 짭퉁을 팔아 돈 좀 벌었다고 대국의 행세를 하니 여간 웃긴 게 아니다. 대국의 자부심이 단순히 권력자들만의 인식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중화 민족주의로 무장한 인터넷 세상의 키보드 워리어들을 보라. 그들은 김치가 파오차이의 아류라며 한국을 도둑놈 취급하고 한복을 자기네 전통 복장이라고 우길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까지 중화민족의 것으로 둔갑시키려 한다. 중국은 확실히 혐오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나라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나라든 경제가 발전해 세계의 이목을 끌면 동시에 민족주의가 싹을 틔운다. 한국인에게는 국뽕이 없을까? 유튜브에는 놀라운 한국 문화에 충격을 받은 외국인들의 비디오가 넘쳐난다. 두 유 노우 김치? 두 유 노우 강남스타일? 두 유 노우 BTS?
반한감정과 혐중정서는 두 나라의 경제 발전에 약간의 시차가 발생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물처럼 보인다. 반한은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이 고작 소중화였던 나라가 세계에 가하는 충격에 대한 시기이고, 혐중은 언제까지나 미개한 나라로 남을 것 같았던 후진국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생긴 공포가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쌍방의 문제다. 중국인에게는 중화 중심주의가 존재하고 한국인에게는 국뽕이 있다. 중심과 뽕은 관계에서 상대방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우열을 세우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 우열 가리기는 누가 보편이냐는 싸움이기도 한데, 한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는 유독 중국의 것들을 특수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당신에겐 전 세계 인구의 20%가 믿고 따르는 신념과 행위를 특수하다고 볼 용기가 있는가?). 한국은 이 보편의 싸움에서 현명한 지저스처럼 중국은 중국의 것이고, 한국은 한국의 것이며, 서구는 서구의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소중화가 트라우마인 이 나라는 그 정신적 공백을 서구적 가치관으로 채워 넣어 자기만의 길을 가려는 이웃나라를 이른바 Global Standard에 미치지 못하는 후진국으로 재단한다.
한편 이 혐오가 실재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가져볼 만하다. 한국에서 연쇄 살인마가 잡혔다고 해서 한국인 전체를 연쇄 살인마로 볼 수 없듯이, 중국에 한국을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중국인 전체를 반한론자로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세상을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인식한다. 일부 채널의 과격한 메시지를 세계의 전부로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럴 땐 집단에서 벗어나 시민과 시민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까 관계의 두 축을 중국인과 한국인으로 놓는 게 아니라 탕웨이와 나로 세워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린 육아의 고민을 공유하고, 맛있는 막걸리에 환호하는, 평범하고 대등한 인간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핵심 내용이 '우리의 물리적 '부근' 혹은 '주변'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p.20)이라고 말한다. 관찰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객관화가 잘 되면 자신이 부당한 처지를 당했을 때 분노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찾으려 노력한다. 또 원인을 알고 나면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해결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한반도를 똑 떼어 다른 곳에 붙이지 않는 이상 인류의 역사가 다 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할 이웃나라다. <차이나 리터러시>는 우리가 이 이웃나라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나름의 궁리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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