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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꿈의 포로 아크파크 시리즈 1권 '기원'

WiredHusky 2011. 6. 5. 15:23




아크파크 시리즈의 1권 '기원'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머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들을 아나니'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아직 이성의 족쇄에 풀려나지 못하는 나를 비웃으려는 듯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들로 견고한 성벽을 만들어 낸다.

이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물론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다. 줄여서 J.C. 아크파크, 아니 그냥 아크파크라 부르자. 그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유머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행정고시를 통과한 고위직인지 9급 말단에서 시작해 여전히 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행색과 주거형태를 봤을 때 말단직일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혹시 말단직이든 고위직이든 매일매일 공평하게 감내해야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건 누구나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구나 '출근'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람쥐와 쳇바퀴? 뿡야!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 아니 아크파크도 일어나자마자 출근을 준비한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넘실거리는 인간의 파도 위로 아크파크도 겨우겨우 몸을 섞는다. 백과 흑으로만 그려진 건물과 사람들이 숨통을 조여오듯 컷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시각적 질식을 위한 완벽한 시도!



가까스로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게 인간의 운명이다. 아크파크도 이 편지를 열어 버린다. 편지 안에는 아크파크의 아침을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가 들어 있다. 그 만화의 제목은 '기원'.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를 그 날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받은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해결사 달랑베르 형제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속수무책. 심지어 기원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크파크의 세계에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아크파크가 편지 봉투에 들어있던 나머지 페이지들을 발견한다. 이 역시 '기원'이라는 만화책에서 찢어낸 것이 확실했으나 그것은 아크파크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페이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아크파크의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크파크는 실존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직면한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쳇바퀴를 돌리던 다람쥐가 잠시 멈춰선다. '나'는 점점 익숙한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같은 인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뿌리째 뽑혀나가는 자아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옮겨 심으려 한다. 이런 이식의 방법으로는 단연코 종교에로의 귀의가 압도적이다. 신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는 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이렇게 외치고 나면 삶이 나가야 할 길은 명확해진다. 인간의 뇌에서 고민이 사라진다. 인식의 전환기, 세계와 존재의 근원으로 내려갈 수 있었던 일생일대의 기회가, 이렇게 맥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크파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다행히 종교를 찾지는 않았다. 아크파크는 나그네가 되기를 원했고 봉투에서 나온 자신의 미래를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만화가 예언이라면 아크파크의 이러한 거부 또한 예견되었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p. 25). 그리하여 그는 만화에서 예언된 27 페이지를 기다려 과연 예언대로 되는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예언은 곧 현실이 됐다.



예언대로 따라 들어간 서점에서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세계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청을 발견한다. 연구원들은 그곳에서 이 세계가(만화 '기원'의 세계) 사실은 어떤 만화(만화 속에서 파크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줬던 그 만화)와 똑 닮았을 거라는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크파크의 '예정된' 방문은 이 같은 가정을 사실로 만드는데 완벽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대발견을 앞에 둔 연구청장 이고르 우프는 아크파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누군가 보낸 사절과 같소, 아크파크 씨! 당신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도 아마 존재할 수 없었겠지... 배경, 인물, 아무것도 없었을 거요.' (p. 34)


<기원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 리뷰는 원래 이렇게 시작했다.

'난해한 책이다. 구매를 충동질하는 문장들로 글을 가득채우고 에둘러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쉽지 않다. 이 책을 읽는 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만큼 힘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를 반복해서 '읽을' 수록 이 책에 난해한 낙인을 찍어 서가 구석으로 밀어 넣는 건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성급한 판단으로 이 책의 미래를 결정짓기에는 만화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꿈의 포로 아크파크는 그 시작에서부터 다양한 철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미래를 향해 수상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미 한번 본 컷들이지만 이들과 다시 마주칠 때마다 하고싶은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게다가 불현듯 등장하는 실험적인 컷 구성은 독자의 뇌수를 파고드는 찌릿한 자극이 되기까지 한다.


                       <구멍난 시간축을 통해 만화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다!>


아크파크 시리즈 1권 '기원'은 원래 43 페이지까지 있었던 듯 보이나 42 페이지에서 그 43페이지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만화는 42페이지에서 끝나고 만다. 이어지는 새카만 페이지 위로 백색의 몇 글자가 도발적으로 떠오른다.


아시다시피 2권은,
내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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