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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영화는 아니다

WiredHusky 2013. 8. 4. 15:59




*당연히 스포일러가 있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나니, 눈의 고장 어쩌고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봉준호의 '설국 열차(2013)'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영화의 원작은 1984년에 출간된 프랑스 만화. 홍대의 오래된 서점에서 손에 쥔 순간 끝까지 읽어버렸다는 봉준호. 그는 '괴물(2006)'이 끝난 시점부터 차기작도 아닌 이 만화의 영화화에 대해 줄기차게 얘기했었다. '마더(2009)'가 그닥 그랬던 이유는 어쩌면 봉준호의 마음이 이미 머나먼 동토의 눈 덮인 설원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봉준호를 위한 첫 번째 변명, 설국 열차에선 봉준호의 냄새가 나는가?


이 영화에서 봉준호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과연 봉준호의 스타일은 무엇인가? 박찬욱하면 미장셴이 떠오른다. 김지운은 멋이다. 혹자는 봉준호에게 디테일의 왕관을 씌우지만 나는 봉준호의 영화가 특별히 박찬욱이나 김지운의 것보다 더 섬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가 다른 작가 감독들과 다른 점은 바로 대중성이다. 그리고 봉준호는 이 대중성을 언제나 유머를 통해 획득해왔다. 


물론 봉준호의 유머는 '마더(2009)'를 기점으로 약간 그로테스크하게 변했으며 이번 영화 또한 그의 변화된 유머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나도 불만이다. 내가 좋아하는 유머는 '살인의 추억(2003)'과 '괴물(2006)'의 드롭킥같은 스트레이트한 것들이지 괴상한 상황과 거기서 나타나는 더 괴상한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기괴한 유머가 아니다. 이를테면 복면을 쓴 적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해피 뉴이어 같은 것 말이다. 물론 내 개인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설국 열차에는 이러한 유머가 넘쳐난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마이크 테스트를 포기하지 않는 틸다 스윈튼, 그런 틸다 스윈튼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진지한 표정으로 확성기를 들고 있는 동양인 부관, 피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한가한 초밥 파티, 윌포드을 찬양하는 아이들의 노래, 심각한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번역기의 어색한 발음 같은 것 말이다. 


설국 열차에서 봉준호의 유머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남궁민수가 감옥에서 구출되는 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궁민수의 대사와 번역기와 그의 '일어나'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는' 요나의 연기. 괴물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요나의 '기상 연기'가 봉준호의 새로운 트레이드 마크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봉준호를 위한 두 번째 변명, 이 영화는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지루하다는 평가는 설국 열차에 대한 지나친 모욕이다. 그렇다면 뭔가? 정확히 말하면, 긴장감이 부족한 것이다. 


사건은 줄줄이 이어진 기차칸을 따라 쉴새없이 폭발하지만 그것은 쭉 뻗은 기찻길을 그저 빠른 속도로 달릴 뿐이다. KTX를 탄 사람은 편리함과 우아함, 그 놀라운 속도에 감탄을 하지만 그렇다고 KTX가 재미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진짜는 에버랜드의 우든 코스터다. 까마득한 레일을 따라 두근두근 꼭대기에 다다른 뒤 뚝 떨어지는, 이 영화엔 그런 쪼는 맛이 없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남궁민수의 제안, 커티스의 고백성사, 윌포드의 진실 폭로 장면이 별다른 충격없이 넘어가는 것을 보라. 기차는 결정적 추락을 위해 서서히 꼭대기를 향해가야했다. 그러나 과정은 없고 폭로는 너무 급작스럽다. 커티스는 갑자기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고 남궁민수는 미친놈같이 '뜻 밖의 행동'을 하며 윌포드은 10년 전에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의 '아키텍트' 코스프레를 한다.


사실 설국 열차는 봉준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영화다. 그가 살인의 추억에서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를 얼마나 절묘하게 버무렸던가를 떠올려 보자. 봉준호는 열차칸을 좀 더 치밀하게 배치하고 그것들을 더 단단히 옭아매야 했다. 밀폐된 기차의 내부를 긴장과 호기심으로 터뜨릴 기세로 말이다. 







지루함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연기였다. 나는 설국 열차를 재미없다고 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연기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크리스 에반스(커티스 역), 제이미 벨(에드가 역. 빌리 엘리엇의 그 아이다!), 옥타비아 스펜서(흑인 엄마 타냐 역)의 연기는 어딘지 모르게 붕 떠 있어 가뜩이나 타이트하지 않은 영화를 더더욱 산만하게 만든다. 애드 해리스(윌포드 역), 틸다 스윈튼(총리 메이슨 역), 존 허트(성자 길리엄 역)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영화관을 뛰쳐나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실패를 슬퍼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지 모른다.



이제부터 진지한 얘기


영화 형식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이제 좀 진지한 얘기를 해보자.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나는 꼬리칸 사람들이 왜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지배-피지배 이야기에서처럼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하는 일 없이 단백질 블럭만 받아 먹는 말 그대로 잉여다. 앞칸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들을 왜 살려두는 걸까?


**스포일러 경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힌트를 찾아보자. 우리의 현대사는 독재의 역사였다. 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외부에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평등, 민주주의? 적화통일을 꿈꾸는 북한이 저렇게 버젓이 존재하는 한반도에서 그렇게 시시한 논의를 하고 있을 여유가 있습니까? 국민들이여 정신을 차리십시요. 우리가 우리끼리 싸우는 동안, 혹은 자기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먹는 순간 평화로운 우리 삶의 터전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앞칸 사람들끼리도 분명 신분의 차이는 있다. 누군가는 매일매일 클럽에서 약에 찌들어 사는 한편 누군가는 매일매일 농장에서 닭똥 냄새를 맡아야 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불만은 잡초처럼 자라난다. 이 때 꼬리칸의 위협은 그들에게 긴장감을 부여하고 긴장감은 내부적 결속을 유발해 체제에 대한 불만을 잊게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반란이 꼬리칸 사람들에게 설정하는 강력한 프레임이다. 사실 반란은 윌포드이 꼬리칸과 앞칸 모두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쇼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그 쇼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들은 서로 죽이지도 않아도 되고, 서로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제 3의 길, 즉 기차 문을 부수고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된다. 


반란군의 리더 커티스는 이런 프레임에 가장 단단히 갇힌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차의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자'는 남궁민수의 제안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기어이 윌포드으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역할, 즉 제압된 반란군의 리더를 연기하기 위해 준비된 패배의 길을 걷는다. 


그 패배의 길 위에서 윌포드이 속삭이는 제안은 참으로 달콤하다. 이제부터 기차의 권좌를 맡아달라는 악마의 유혹. 이것은 마치 젊은 시절 전부를 바쳐 싸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게 몸을 팔아 기어이 권력을 쟁취하고 만 문민정부의 탐욕자 김영삼을 떠올리게 한다. 시대가 개벽한 듯 선전을 했지만 그 후 20년 동안 세상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윌포드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기차의 주인은 바껴도 기차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반란은 또 일어날 것이고 그것은 중간에 제압될 것이다. 운 좋게 엔진실까지 온다 하더라도 그에게 권좌를 물려 주고 떠나면 역사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기차는 영원히 달릴 수 있다. 


우리는 이 섬뜩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채 여전히 좌와 우로 나눠 소리를 지르고, 싸움을 벌이고, 피를 흘린다. 세상은 그 피를 벌컥벌컥 마시며 즐거운 콧노래를 부른다. 







추신, 그런데 왜 곰이죠?


영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북극곰 얘기를 좀 하자. 곰은 일반적으로 생태계 최상위의 포식자다. 그러니까 곰이 있다는 것은 곰이 먹을 초식 동물이 있다는 것이고(물론 곰은 잡식이긴 하다) 초식 동물이 있다는 건 어딘가에 풀이 있다는 얘기이며 풀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땅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곰은 세상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것에 대한 암시이며, 새 시대의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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