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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2_전설의 술탄, 살라딘

WiredHusky 2014. 6. 8. 18:43






아버지의 위대한 이름


역사를 살피다보면 종종 뛰어난 선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는 2세의 존재에 놀라게 된다. 이유가 뭘까? 추측컨대


첫째는 큰 일을 하느라 바빴던 탓에 자식 교육 혹은 그 생산 자체에 소홀했던 탓이리라. 둘째는, 아마도 아버지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자기 뜻을 펼치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누구누구의 아들'로 불렸을 것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혁신은 커녕 매번 안전하고 고분고분한 길만 택했으리라.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에게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치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쉬운 길이라도 아버지의 이름이 주는 부담감은 필시 실수를 연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을 하면서 실수까지 한다면 그 자신마저 '아 역시 난 안되는구나'하는 패배감을 품는 게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1095년 툴루몽 공의회에서 시작해 1099년 예루살람 해방까지 불과 5년 만에 위대한 목표를 달성한 십자군 1세대는 그 후 18년에 걸쳐 정복을 확고히 함으로써 십자군 국가의 존재를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그러나 1118년, 1차 십자군 세대 중 마지막으로 남은 예루살렘 왕 보두앵이 세상을 떠난다. 위대한 세대의 완전한 퇴장이었다.



흥망성쇠, 인간사의 진리


영광 후에는 쇠락, 쇠락 후에는 영광이 따르는 게 인간사의 진리다. 전술했듯 1118년 이후로 1차 십자군이라 불리운 영광의 세대는 전원 퇴장했다. 이 공백을 틈타 이슬람 세력은 1144년 1차 십자군의 최초 함락지인 에데사 탈환에 성공한다. 에데사 탈환은 십자군 국가 방어의 최전선을 잃었다는 현실적 타격을 넘어 십자군 국가에 더이상 신의 가호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예루살렘 해방 이후 50년 가까이 승리의 향기에 취해 있던 유럽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제후들의 십자군이라 불리운 1차 원정 때와는 달리 2차 십자군은 프랑스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친히 참전한 왕들의 전쟁이었다. 왕들이 손수 이끌고 온 은빛 기사들의 물결. 이 중무장 기병의 위용을 보고 원정의 실패를 떠올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2차 십자군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동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이들이 성도에 도착한 건 1148년 4월 3일 이었다. 여세를 몰아 전쟁을 시작했다면 좋았으련만 신앙심이 깊었던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성지 순례를 원한 탓에 개전은 7월로 밀리고 만다. 혹서가 지배하는 중동의 한 여름에 군사 행동을 하겠다는 멍청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뿐만아니라 군대의 목표는 함락당한 에데사가 아니라 다마스쿠스였다. 대대로 풍요를 자랑했으며 바그다드 이전엔 이슬람의 수도로 불린 다마스쿠스다. 규모도 더 컸고 용맹했던 1차 십자군 조차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고도를 감히 차지하겠다고 나선 건 왕들의 허세였을까 아니면 심각한 자만심 이었을까? 전투가 시작된지 고작 나흘,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깨끗히, 군대를 물린 걸 보면 아무래도 허세였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지켜주었나


2차 십자군 원정 실패의 악영향은 여러모로 컸다. 왕이 친히 이끈 군대가 아무것도 못하고 물러난 것이다. 유럽의 가장 강력한 왕들도 지킬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이 땅을 지켜준단 말인가? 이같은 공포심이 십자군 국가 전역에 퍼진 것은 당연했다. 반대로 왕들을 물리친 이슬람 쪽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1144년 에데사가 함락된 이후 무려 33년이 지난 1187년 까지 십자군 국가는 단 한 뼘의 영토도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기사단. 90년대 초반에 판타지를 읽었던 남자라면 로도스 기사단 이라는 이름에 가슴이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 로도스 기사단이라는 이름은 사실 예루살렘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했던 성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이다. 말했듯 원래 의료 봉사가 주목적이었던 이 기사단은 난세에 힘입어 전투 집단으로 거듭났다. 


한편 성 요한 기사단과 더불어 난세의 성도를 지킨 기사단이 바로 그 유명한 템플 기사단(성당 기사단)이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예수회 등등 종교 관련 믿거나 말거나 식 전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기사단은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신 앞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단이었으며 전투가 벌어지면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적진을 파괴한 기사중의 기사였다. 


비록 그 수는 적었으나 이들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중무장한 기사였다. 게다가 크고 작은 싸움으로 전투에는 이골이 난 베테랑.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탄 이 '중세의 꽃'은 일반 보병 혹은 기병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의 일당백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이 기사단이 짓고 관리해온 성채였다. 단 한 번도 전력 부족에 시달리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십자군 국가였던 만큼 요소요소에 성채를 지어 소규모 병력으로도 운영 가능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셋째는 당시 이슬람 세력의 관심이 십자군 국가 보다는 자국의 통일에 있었던 탓이다. 따지고 보면 십자군 국가는 지중해에 곰팡이처럼 피어 기생하는 한 줌의 나라 아니던가. 천하제패에는 어디까지나 순서가 있는 법이다.


넷째는 그야말로 신의 가호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시리아의 대지진이었다.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지진이 끊이지 않는 중동이니 그때라고 예외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알레포, 모술,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오늘날 이라크의 북부와 시리아 전역을 통일해 더 이상 뒤통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이슬람 세력에게 이 지진은 그야말로 뼈아픈 재난, 그리스도교도에겐 신의 가호였을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십자군 국가는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시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유용하게 쓰는 건 아니다.



마침내, 살라딘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대지진의 피해를 착실히 복구한 중동의 이슬람 세력은 때마침 이집트 왕조의 분열이라는 호재를 맞게 된다. 호재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한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시대 이슬람에는 확실히 호재를 호재로 알아보는 인재들이 있었다. 


분열을 틈타 이집트로 군대를 이끌고 간 것은 소수파 쿠르드족 출신의 시르쿠였다. 그는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이집트 전 영토의 3분의 1을 양도한다는 조약에 서명한다. 아군과 적군을 포함해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계획된 것이었을까? 시르쿠가 예언자의 묘소에 참배를 떠난 사이 그의 조카가 일을 저지르고 만다. 카이로의 재상을 죽이고 백부 시르쿠를 그 자리에 추대한 것. 반대는 없었다. 소수파 출신 시르쿠가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최고 권력자는 취임 두 달만에 욕실에서 머리를 다쳐 죽고 만다. 뒤를 이은 건 31세의 조카, 살라딘이었다. 


중동의 이슬람 세력은 이 애송이를 여전히 자신의 부하 정도로 생각했으나 살라딘에게는 추호도 부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 온도차가 결국엔 화를 부르고 만다. 이제 살라딘은 눈엣가시가 됐다. 소수 민족 출신인 주제에 나이까지 어린 애송이가 성질을 살살 긁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러나 살라딘을 제거하기 위한 군대는 군 최고통수권자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출진조차 하지 못했다. 이 권력의 공백을 놓칠 살라딘이 아니다. 이집트를 떠난 살라딘은 때로는 군사력을 앞세워 또 때로는 정치력을 발휘해 중동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간다. 그리고 1186년, 마침내 살라딘은 이집트와 중동을 아우르는 이슬람 역사 최초의 통합 군주가 되었다.


자기 땅에선 더 이상 우환이 사라진 살라딘의 눈에 띈 건 당연 지중해에 잔뜩 몸을 웅크린 십자군 국가였다. 1187년 3월 13일,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살라딘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 최초의 '지하드(성전)'을 선언한다. 


나는 1차 십자군의 성전이 '불과 5년 만에'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대업을 이뤘다고 쓴 바 있다. 그러나 살라딘의 지하드는 고작 7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재탈환함으로써 마무리된다. 7개월이다. 계절이 고작 두 번 바뀌는 새에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제 십자군에게 남은 건 정말 한 줌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루스 뿐이었다. 그러나 바다로 이어진 이 한 줌의 땅이 또다시 반격의 실마리가 되니, 그 전쟁의 주인공은


전설의 사자왕 리처드였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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