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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3_사자심왕 리처드

WiredHusky 2014. 6. 15. 17:55






예루살렘 함락


살라딘의 등장과 함께 예루살렘이, 그것도 너무나 쉽게 함락됐다는 사실은 전 유럽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성도 예루살렘이다. 아무리 전략적 가치가 높다 한들 '에데사'와는 급이 달랐던 것이다. 3차 십자군은 누가 제창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결성됐다. 게다가 이 3차 십자군은 왕들의 전쟁이라고 불린 2차 십자군 원정 때 보다도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이유는 국가로서는 최초로 영국왕 헨리 2세가 참전했기 때문인데, 당시 영국은 오늘날과 같은 섬나라가 아니라 프랑스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유럽의 대표국이었기 때문에 3차 십자군은 그야말로 최정예 유럽 군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원정을 떠나기도 전에 이 강력한 영국왕을 물리친 자가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헨리 2세의 아들, 사자심왕 리처드였다. 



사자심왕 리처드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는 뜻의 사자심왕. 이 별명을 지은 건 마땅히 자기 왕을 칭송하기 마련인 영국인도, 원정을 승리로 이끌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품은 기독교인도 아닌, 리처드의 칼을 직접 몸으로 맞아본 이슬람교도였으니 이런 전쟁이면 으레 만들어지기 마련인 허황된 신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은 결코 혼자 하는 게 아니니 이 3차 십자군의 공을 모두 리처드에게 돌리는 건 지나치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왕 필리프 2세는 십자군 원정으로 군사적 공백 상태가 된 유럽을 차지할 야욕을 품고 개전 3개월 만에 군대를 물리고 만다. 이를 보고도 리처드가 성전을 계속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원정을 떠나기 전 필리프 2세와 맺은 상호불가침 조약 때문이었다. 정직한 사람의 최대 단점이 역시 상대방도 자신과 같이 정직할 거라 믿는 마음이라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행보였다. 기병 3천에 보병 8만. 역대 최대라 할 수 있는 대군을 이끈 황제 붉은 수염은 행군 도중 강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군은 아주 일부만 남긴 채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대군을 자국으로 물린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공정한 역사를 쓰기로 마음 먹은 역사가도 3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을 오로지 리처드의 공으로 돌리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개전과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십자군 국가의 옛 도시를 재탈환한다. 항구도시 아코에서 시작한 수복 전쟁은 아르수프, 야파, 아스칼론까지 실패없이 이어졌다. 상대는 중동의 이름 없는 영주가 아니라 전설의 술탄 살라딘 이었으니 '실패없이'라는 말이 가진 전공의 무게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코 앞에 둔 리처드에게 비보가 도착한다. 필리프 2세가 리처드의 동생과 손을 잡고 영국을 침략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겠지만, 사자왕이라 불리운 남자다. 그는 고작 천사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살라딘이 손수 이끈 이만명의 군대를 패퇴시킨다. 뒤이어 보내온 강화 요청을, 살라딘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 내용에 예루살렘의 반환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십자군 국가는 지중해에 면한 여러 항구를 포함해 리처드가 수복한 영토의 대부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용맹한 사자를 상대하는 데 온 힘을 다한 탓인지, 전설의 술탄 살라딘은 1년 뒤에 숨을 거두고 만다.



붉은 수염의 손자


사자왕 리처드도 해낼 수 없었던 예루살렘 탈환을 성공시킨 건 물에 빠져 죽은 황제 '붉은 수염'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였다. 어쩌면 그는 종교 전쟁의 사악함을 깨달은 최초의 유럽 군주가 아니었나 싶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 보통의 왕족들과는 달리 평민과 어울렸다. 그 평민 중에는 이슬람교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타 유럽 왕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알았으니 그들의 문화와 삶, 그리고 신앙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결코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이해. 배타심이란 본디 다른 사람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무너지는 법이다. 이런 소년이 황제가 됐으니 어찌 성전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교황을 비롯해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는 편협한 광신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나라의 황제로서 성전에 나서지 않는 프리드리히 2세에 분노했다.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전쟁을 피해왔던 황제였으나 예루살렘 왕위를 이어 받고 뒤이어 교황의 파문까지 받은 탓에 더 이상 전쟁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전쟁은 말과 창을 달리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그는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외교적 협상을 시작했다. 석달에 걸친 교섭 끝에 황제가 얻어낸 것은 예루살렘. 믿음의 사람들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얻어낸 이 쾌거를 역시 같은 이유로 경멸했다. 이슬람 사료에 따르면 '굴욕'이라고 부를 정도의 뛰어난 성과였는데도 말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어쩌면 성스러움에 지친 그들에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일종의 변태적 욕망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흐르는 이교도의 피 속에서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기독교인들. 이후에 유럽을 지배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런 머저리였다는 사실은 얼마 안되는 중동의 평화를 지옥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후의 이야기들


프리드리히 2세 이후에 십자군을 이끈 인물들은 사자왕 처럼 특출난 전투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프리드리히 2세처럼 뛰어난 외교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전투도 외교도 없었으니 그들에게 남은 건 오로지 재앙 뿐. 가진 건 신앙심 밖에 없었던 프랑스왕 루이 9세는 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 간단히,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1차 부터 7차까지 150년의 원정 기간 동안 일국의 왕이 포로로 잡혔던 적은 이 때가 처음일 만큼 말 그대로 '미증유의 패배'였던 것이다. 이 패배로도 부족했는지 막대한 몸 값을 치르고 풀려난 루이 9세는 20년 뒤 제 8차 십자군을 일으킨다. 20년 전의 패배가 두려웠는지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뱃길로 가까운 튀니지아를 목표로 삼지만 상륙 한달 만에 역병을 만나 군대를 물린다. 재앙의 씨앗 루이 9세도 마침내 이곳에서 숨을 거둔다. 


뛰어난 능력자에게 조차 거침없이 불운을 쏟아내는 게 역사의 잔인함이다. 그러니 멍청이들에겐 얼마나 더 가혹했겠는가? 루이 9세의 죽음 이후 십자군 국가의 존망은 그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21년 뒤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를 몰락 시키고 정권을 잡은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카릴이 십자군 최후의 도시 아코를 함락시킴으로써 200여년에 걸친 십자군의 역사는 사막의 먼지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1291년 5월 18일의 일이다.



시오노 나나미와 십자군 이야기


지중해의 전쟁 3부작, 로마인 이야기 두 권,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그리고 이 십자군 이야기까지 시오노 나나미의 책 9권을 읽었다. 지중해의 전쟁 3부작은 역사를 소재로 하나 어디까지나 '소설'이며 <로마인 이야기>는 방대한 사료가 다소 지루하게 흐르는 사료 모음집이라 할 수 있고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가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감상을 형식없이 풀어내는 수필에 가깝다. 나의 선호를 밝히자면 역시 소설과 수필이다. 역사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대단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소설가도 아닌 탓에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로 접할 수 있어 아주 좋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는 그 제목에 이야기가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다르다. 담담히 사료를 풀어내는 그녀의 필치는 확실히 사랑하는 것을 정렬적으로 적어낼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한 마디로, 조금 지루하다. 


이 <십자군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래도 <로마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다소 과장을 섞더라도 살라딘과 사자왕의 대결을 시오노 나나미가 그리는 소설로 봤다면 어땠을까? 이게 바로 어쩔 수 없는 시오노 나나미 팬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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