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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_<정의란 무엇인가>의 후속편은 아니야

WiredHusky 2014. 6. 22. 19:10






로켓에 올라타!


초특급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가 나온지 6개월 뒤 출간된 이 책은 저자가 똑같이 마이클 샌델임에도 불구하고 꼬릿꼬릿한 장사꾼의 냄새를 풍긴다. 급한 기획에 좋지 않은 번역, 게다가 대부분 <정의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되풀이 함에도 불구하고 4년간 32쇄를 찍었다는 사실은 한국경제신문이 얼마나 좋은 장사꾼이었는지를 증명한다장사꾼들 사이엔 이런 말이 있지. 


'로켓이 출발할 땐 묻지 말고 올라타!'


필시 이 책을 사기 위해 이곳에 들렀을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하자면, 


사지 마세요. 반값 할인해도 사지 마세요. 


<정의란 무엇인가>에 깊이 감명한 나머지 그의 후속작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른 책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마이클 샌델의 책을 처음 접하는 것이라면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쪽이 번역도 편하고 정성도 많이 들였기 때문이다. 민주 시민에겐 올바른 행동에 마땅한 보상을 부여할 할 책임이 있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왜 도덕인가?'라는 거창한 제목을 무시하고 단도직입, 샌델의 주장을 핵심만 꺼내보자. 그것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공동체가) 직접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책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생각'이라는 걸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뒤부터 자기가 설정한 가치와 목적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그러나 이 같은 믿음은 현실 세계의 첨예한 가치 논쟁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취약한 근거 위에 세워졌는지 깨닫게 된다. 


최근 논란이 되는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을 생각해보자. 그의 간증은 사실 중교인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떠나 이 발언은 그가 얼마나 신실한 종교인인지를 증명하는 모범적 발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마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는(물론 내용에 문제는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창극이 누군가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지 않은가. 좀더 강경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문창극 발언 자체는 그의 권리이나 이렇게 잘못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총리가 될 수는 없다는 관점에서 그를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똘똘이 스머프들의 논리적, 이성적 판단과는 달리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의 발언에 심각한 모욕을 느낄 것이며 나아가 문창극의 간증이 단순히 남들과 '다른'것이 아니라 '틀리'다는 주장을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살아가는 게 좋은 한국인의 삶이라는 걸 우리가 당연히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엔 좀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성숙한 시민의 미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이 좋은 삶을 제도화 하고자 모든 사람들에게 빈곤세를 거뒀다고 하자. 벌써 분노로 이글거리는 당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결코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그렇다면 자유인인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간통죄에 찬성하는가?


나는 솔직히 간통죄가 사람의 감정을 법으로 강제하는 악법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결혼 생활이란 감정이 소멸한 배우자를 신뢰와 정으로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라 불타오르는 감정을 찾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게 아닐까? 그게 두 사람의 정신 건강에도 훨씬 좋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를 음탕한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좋은 결혼 생활이란 배우자에 대한 신뢰를 죽을때까지 지키는 것이며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결혼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눈치 챘겠지만 빈곤세에 반대하는 사람과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근거는 완전히 같다. 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내기 싫은 자유주의자라면 당신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쿨하게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샌델의 당부


이런 모순이 시사하는 바가 뭘까? 그것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가리는 일이 될 것이다. 샌델은 그 방법으로 공동체의 합의를 제시한다. 물론 이것은 다수의 사람, 다수의 단체가 지지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적 규범을 그대로 따르자는 것도 아니다. 


샌델은 우리가 컴퓨터와 TV가 있는 방을 나와 광장에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 광장엔 대학 교수와 택시 운전사와 부자와 막노동꾼과 평범한 회사원과 전문직 연구원이 모두 모일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점잖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쉬쉬해왔던 종교와 정치와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때로는 강력한 이견에 부딪혀 모든 게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타인의 관점과 이견을 접할 수록 이해는 커녕 경멸과 증오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샌델의 말마따나 '시도해보기 전까진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법' 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몽준 같은 사람들은 죽을때까지 '70원 밖에 안하는 버스비가 뭐가 비싸다고 난리를 치냐'고 핏대를 올릴 것이며 그의 아들은 '역시 미개한 국민을 교화하는 건 불가능하니 아버지에게 미국 주지사에 출마하는 건 어떻겠냐'고 말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1989년 개포동의 주공아파트 78동에선 매주 한 번씩 반상회가 열렸다. 거기선 어느 사장님의 운전 기사와 대학 교수와 회사원이 한데 모여 어떻게 해야 78동 주민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지 논의했다. 이 필부들의 회의가 사회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1989년의 개포동이 2014년의 개포동보다 훨씬 살기 좋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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