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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_인내와 침묵의 싸움

WiredHusky 2017. 3. 19. 11:56





랜덤하우스코리아가 우리 나라 출판계에 준 선물이 있다면 켄 브루언과 존 르 카레일 것이다. RHK에는, 시공사가 촌스러운 대사 번역으로 70년대 서가에 쳐박아 버린 켄 브루언과(런던 대로) 열린책이 난독증 유발자로 낙인을 찍어버린 존 르 카레를 양지로 끌어 올린 공로가 있다. 재미와 문학모두 잡으려는 이 외국계 출판사의 노력과 의지에 감사의 인사를.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존 르 카레의 또 다른 자아 스마일리가 최대의 숙적 카를라와 벌이는 첩보 대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답답할 정도로 고독한 두 남자의 암투가 드디어 이 책을 통해 막을 내린다. 결투의 시작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영화로 접한 나는 곧장 존 르 카레 빠져버렸고 그 다음 얘기가 <Hornarable Schoolboy>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편을 넘기고 3편으로 가야 하나?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서커스와(영국 정보부) 모스크바 센터(KGB)의 대결은 시간을 거듭할 수록 눈에 밟혔다. 애꿎은 영화만 다시 보기를 수차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참지 못하고 결국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손에 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소설이다. 이것이야 말로 첩보 소설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 외무부(영국 정부는 정보부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첩보원들의 소속을 말할 때 대개 외무부라고 한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진짜 스파이였다. 틈이 날 때 마다 종이 위에 이야기를 끄적였고 그것이 이 대작으로 태어난 것이다. 탄생 과정이 매우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분위기와 사실성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기밀이라 확인이 불가한 탓에 상상을 좀 덧붙이면, 어쩌면 이 소설이 존 르 카레 자신이 참여했던 작전들의 일지가 아닐까.


스마일리는 제임스 본드 보다는 셜록 홈즈에 가까운 인물이다. 작은 단서에서 건져낸 조그만 실마리를 잡고 하나 하나 사건을 엮어 나간다. 스마일리는 언제나 과묵하다. 답답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다. 그는 정보전의 승패가 상대의 정보를 캐내는 것에 앞서 내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남자다. 그래서 이 침묵의 노인은 그의 행동을 쫓아가는 독자의 답답함을 알고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나간다. 마침내 진실에 손에 쥐었을 때 조차 그는 잰체하거나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더 많이 아는 것이 더 많이 아픈 것이라는 진리를 아는 사람 같다. 우리는 그가 찾아낸 진실을 손에 들고 두 번 세 번 돌려보며 환호를 지르지만 그는 이 모든 소동 앞에서 신음할 뿐이다. 이 고독한 남자의 매력에 빠지고 나면 다른 모든 스파이들은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소설 속에서, 스마일리의 말과 생각은 혼재해 있고 구성마저 매우 복잡한 탓에 이야기를 따라가기는 커녕 문장 조차 잘 읽히지 않는 고욕을 경험할 수 있다. 두 번, 세 번 페이지를 되돌아가며 이야기를 되짚는 경우가 당신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복잡성 때문에 우리는 스마일리의 마지막 결투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으면서도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놀라움을 경험할 것이다. 스마일리의 침묵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우리가 고작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그는 몇 걸음이나 앞서 나가고 있었는지, 되풀이 되는 독서 과정 속에서 속속 드러날 것이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읽고 있으면 암투라는 게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기를 느껴 날아오는 암기를 모조리 피하는 중국 무협 따위의 판타지는 없다. 이기는 방법? 승리를 거둔 뒤 무대를 빠져나가는 스마일리의 상처에서 그 비밀을 알게 된다. 정답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 총탄 살갗을 파고들어 뼈를 부순 뒤 반대 쪽 살갗을 뚫고 지나갈 때, 일말의 신음 소리도 내지 않는 것. 어둠 속에서 터져나와 나의 위치를 밀고할 비명을 숨기지 않으면 적의 무기는 기어이 그 비명을 찾아와 집요한 총탄 세례를 퍼부을테니까. 결국 스파이들의 싸움은 인내와 침묵의 싸움인 것이다.


존 르 카레는 사상의 대립이 만들어낸 냉전과 냉전이 만들어낸 비인간적 첩보전을 황홀할 정도로 고독하게 그려낸다. 흔히 첩보전을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비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만큼 압도적 고통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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