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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러블 스쿨보이

WiredHusky 2022. 11. 6. 10:22

<오너러블 스쿨보이>는 카를라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나는 이 3부작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오너러블 스쿨보이> 순으로 봤는데, 비슷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면, 시간 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떤 책을 먼저 읽어도 당신은 이 마스터피스의 깊이와 우아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물론 이 3부작이 모두 다 번역 출간된 이 시점에서 굳이 시간 순서를 다르게 읽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아마 판권이 문제였던 것 같은데 팅커와 오너는 열린책들에서, 스마일리는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펴냈다. 나는 팅커를 영화로 시작해 정주행을 노렸으나 중간이 비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금단 현상에 괴로워하다 결국 스마일리에 먼저 손을 댔다. 이제라도 퍼즐을 다 맞췄으니 여한이 없다.

 

 

<오너러블 스쿨보이>는 카를라가 무너뜨린 영국 정보부를 스마일리가 재건하는 과정을 다룬다. 스마일리의 역습. 그러나 이 단어가 풍기는 역동적 에너지와 다르게 이 늙은 스파이는 천천히, 은밀하게, 적의 숨통을 조여나간다.

 

이야기는 3부작 중 가장 방대하다. 중국-러시아-홍콩-영국-태국-베트남-기타 국경을 마주한 동남아시아가 배경이다. 씨실과 날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 최종 단계의 문양을 추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전말이 드러난 최종장에 이르러서도 그 완성된 무늬가 무엇을 그려낸 것인지 모를 정도다. 바로 이 부분이 존 르 카레의 소설을 단순한 장르를 떠나 위대한 작품으로 만드는 요소이자 독자를 괴롭히는 요인이기도 하다.

 

행간에는 수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어 두 번 세 번 곱씹어야 한다. 그 어떤 스파이도 행동의 이유를 시원하게 밝히지 않는다. 존 르 카레의 캐릭터들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빈 공간을 유추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의 이야기가 그저 지루한 중얼거림으로 들려 피로를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취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존 르 카레, 특히 이 카를라 3부작을 지나친다면 인류 문학사의 아주 중요한 페이지를 찢어버린 거라고 생각해도 좋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세계는 언제나 회색지대에 놓여있다. 그들의 활약은 결코 영웅적이지 않다. 삶은 늘 비참하다. 이 비참함을 이겨내는 건 사랑 같은, 촌스럽지만 결코 시들지 않는 인류의 보편 가치인데 이걸 강렬히 추구할수록, 그러니까 온 힘을 다해 인간다워지려고 노력할수록,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게 이 이야기의 특징이다.

 

스마일리의 이야기를 거의 모두 읽은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작고 뚱뚱한 노인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체 위에 쌓아 올린 정보부, 아니 영국이란 국가는 스마일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간다워지기 위한 노력을 짓밟아 버리는 체제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저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스마일리가 이 관점에서 그 모든 고독을 짊어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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