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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본문
이 책은 얼핏 심리학 도서로도 보인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니,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효능감을 강화하는 주제를 다룰 것만 같다. 하지만 카를로 로벨리다. 또, 양자역학이다.
카를로 로벨리 책 중에선 독해가 가장 쉬웠지만 그렇다고 내용까지 쉬운 건 아니었다. 로벨리는 이 책에서 기존의 양자역학이 이 세계의 실재에 대해 서술한 것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예컨대 이 세상을 물질의 파동으로 본 슈뢰딩거의 생각이나 관찰이 갖는 의미, 파동 붕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탐구하다 덧붙인 평행우주 같은 관점들이다.
저자는 이 모든 생각들이 양자 세계의 기이함을 어떻게 해서든 설명하기 위해 끼워 맞춘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세계의 실재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은 양자역학이 갖는 확률적 속성 탓에 단순히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끊임없이 내리쬐는 빛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불연속적인 양자의 집합이다. 마치 수많은 0과 1의 집합인 디지털 세계처럼.
로벨리는 양자이론이 관찰 가능한 것만 설명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생각과 양자이론은 사건이 발생할 확률만을 기술한다는 보른의 주장, 그리고 양자 세계가 근본적으로 입자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이론을 시작한다. 차이는 양자역학이 단순한 확률 계산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것들을 '관계'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통합한다.
로벨리의 '관계'는 이 세상을 촘촘한 상호작용의 그물망으로 정의한다. 어떤 대상의 고유한 속성은 오직 관계에서만 드러난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가진 고유한 속성으로 이뤄진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나의 속성은 오직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나는 분명 회사 사람을 대할 때와 가족을 대할 때 다르다. 나의 성격은 확실히 누구와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속성이 애초에 나라는 존재에 내재된 게 아니라는 주장으로 확장할 수 있는 걸까? 내가 그런 속성을 드러냈다는 건 애초에 나에게 '그런 면'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닌가?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면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 환경과 상호작용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 그렇다고 해도, 그 모습 또한 내가 가지고 있었기에 드러나는 게 아닌가?
로벨리는 상호작용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것이 돈을 벌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어?라는 말이 돈이라는 실체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냥 의미적으로 그렇다는 건지, 아니면 쓰지 않는 돈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거라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 전우주의 모든 입자가 더 이상 달과 상호작용하지 않기로 다짐하면, 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어쩌면 로벨리는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주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존재는 그 연결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거니까.
정말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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