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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고전 안내서 - 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 깨기'

WiredHusky 2011. 8. 2. 22:42




고전이란 제목과 줄거리는 읽히 들어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읽어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읽을 예정이 없는 책을 말한다. 또 고전이란, 보통 사람들은 고사하고 책 깨나 읽는 사람들마저 그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책을 말하기도 한다. 의욕 넘쳐 구매한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은 독서를 종용하는 희망찬 송가가 되지만 곧 목구멍을 짓누르는 바위가 됐다 이내 실내 장식으로 전락하고 마는게, 이른바 '고전'이란 것의 운명인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 너무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은 각 시대별로 최초의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의 저작인데, 아무래도 사람들은 '최초'라는 가치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최초'라는게 그렇게
대단한가? 서양 근대 문학의 물꼬는 셰익스피어가 아니었어도 결국 누군가는 틀지 않았을까? 시대를 송두리째 뒤집어 버리는 새로운 물결, 새로운 시도란게 과연 한 명의 천재적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한 걸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위대한 인간이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기로에 들어선 시대가 우연히 빚어 내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한권의 가치가 몇 백, 몇 천년을 이어 내려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고전이, 최초라는 재기발랄함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는 이내 구식이 되 버리지만
'보편'은 결코 시들지 않는 법이다.




'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 깨기'는 이 보편적 가치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눈다. 그리고 이 장들에서 각각 세 권의 고전을 소개한다. 이 책의 탁월함은 바로 이 구성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시작해 세상의 모든것을 연역하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서 1장은 '나를 바라보기'다.

'나를 바라보기'위해서 소개되는 책은 카뮈의 '이방인'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다. 저자가 이 책들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사회적 관습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질문을 곱씹어 보자. 그러면 어느 순간 나를 둘러 싸고 있던 익숙한 세계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좀더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다.

철학적 사유는 바로 이 낯섬과 무지의 공포가 만들어 놓은 삶의 균열을 비집고 탄생한다. 이때 '철학적 사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괴로움을 맛보지만 동시에 우리를 둘러 싸고 있던 '당연한 진리'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흔히 이것을 '껍질 깨기'라고 부른다.



                                       <출처: Flickr. Sammy Naas>


'껍질 깨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비로소 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찬찬히 혹은 진지하게 그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는 사람과(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껍질 안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의 진정성과(셰익스피어의 '햄릿') 세계와의 육체적 다툼을 통해 그것을 긍정하는(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인간의 모습을 인식한다. '나'를 넘어 '너'를 인식하고 비로소 '우리'의 연대가 시작되는 시간. 2장의 제목은 '우리와 마주하기'다.

껍질의 실체를 깨닫고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동지가 된 '나'의 두 손엔 어느새 뾰족한 망치가 들려있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하여 껍질이 이루고 있는 단단한 구조의 비밀을 파악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껍질 깨기에 나선다. 튀어오르는 껍질이 얼굴에 부딪히면서 수 많은 생채기를 낸다. 손에는 어느새 굳은 살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철퇴를 휘둘러 세상을 응징'하기다. 철퇴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은근한 풍자의 모습을 띄는가 하면(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조용한 묘사 속에 묵직한 메시지를 숨겨두기도 하고(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정해진 목적과 질서 속에서 세상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신과 종교에 대적하며(호메로스 '오디세이아') '확신에 찬 이 세상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 남은 일은 폐허가 된 세상에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이 소중히 간직하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해봐야 한다. 또 새로운 세상 만들기라는 맹목적 목표가 다시금 두터운 껍질이 되어 인간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지 지켜봐야 한다. 마지막 4장의 제목은 '이상으로 나아가기'다.

이 책의 구성은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기계 군단의 억압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하는 여정과 닮아 있다. 네오가 모피어스의 빨간약을 먹고 '나'와 '세계'의 진실을 인식한 뒤 마침내 시온이라는 이상을 지켜냈듯이 독자는 고전이 풍기는 시큼한 방부제 냄새를 맡으며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세계로 그리고 마침내 이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
받는다.



저자는 한성여고에서 문학과 논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문장은 구어체로 읽기 쉽게 씌여졌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고전을 이렇게 쉬운 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은 그렇게 흔치 않다. 만일 내가 고등학교 때 이런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60세로 계획한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적어도 10년은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나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을 소개한다고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저자는 매 챕터마다 등장인물과 가상 인터뷰를 진행하며 책의 줄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봐!

보너스로 각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는 고등학생이 쓴걸로 보이는 감상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만만히 봤다간 큰 코 다친다. 몇몇의 감상문들은 기가 죽을 정도로 잘 쓴 글들이 많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에게 논술을 지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활용해 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Education의 어원은 '무언가를 이끌어 낸다'라는 것이고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진실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 자처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선생 김태빈'은 Education의 화신이자 진정한 산파다. 내 일찍이 허풍으로 이름을 날려 뭇 사람들을 불신의 세계로 몰아 넣은 전력이 있으나, 그대여 이번만큼은 나의 진심을 알아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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