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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사정 없는 냉혈한? -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WiredHusky 2011. 11. 23. 23:07




얼마 전 창덕궁 후원(비원)을 다녀오고 많은 것을 느꼈다. 요즘 사람들에게 창덕궁이니 덕수궁이니 이제는 시멘트 바닥이 깔리고 미술관으로 변해버린 옛 건물에 전혀 감흥이 생기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나, 그것이 역사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고궁을 탐방하면서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쩐지 쑥쓰러워, 감상이란 대상과 자신의 내면 사이에 일어나는 은밀한 대화인 법이지, 그러니 이것저것 알아볼 필요없이 그냥 둘러보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역사는 과묵하다. 과묵한 상대와의 대화는 언제나 힘들 수 밖에.

게다가 당신의 눈썰미는 생각보다 날카롭지 못하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액자로 만들어 주는 정자 기둥의 장식과 다른 문들과 적어도 두 단 이상은 높이 올라있는 솟을 대문의 미묘함을, 당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확률이 높다. 설령 그 차이를 가까스로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나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가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오노 나나미로 따지자면 지중해 역사, 그 최고의 가이드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베네치아, 피렌체, 메디치 가, 가톨릭 교회와 교황, 그리고 투르크인. 한 마디로 지중해와 연관된 모든 국가 모든 인물들을 매의 눈으로 철저히 해부하는 외과 의사(그녀는 이탈리아인 외과 의사와 결혼했다!). 만일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를 읽지 않은 채 혼자 이탈리아를 여행한다면 그 유구한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왜냐구? 우리는 가이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만일 그녀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혹은 독어로 책을 썼다면 우리는 이토록 유려한 가이드를 이토록 쉽게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아시아인으로서는 도저히 견줄자가 없을 정도의 식견. 게다가 이런 역사책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수 백권의 역사 자료(원서에다 따분한!)를 검토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 십권에 쏟아야할 에너지를 단 한권에 쏟아 붓는 작가 치고 다작을 하기 힘든 법인데, 이 70세가 넘은 노파는 소시적부터 어마어마한 집필욕을 보여줬다. 1988년, 이런 여인의 감성을 자극해 기어이 펜을 들게 만든 주제가 바로 피렌체의 마키아 벨리다.

렌체로 말할 것 같으면 칠흑같은 중세를 깨부순 르네상스의 요람이다. 당시의 피렌체에는 최후의 만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지 창조의 미켈란젤로가, 비너스의 탄생의 보티첼리가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아하!하고 무릎을 칠 금융업의 대부호 메디치 가(家)도 있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마음을 뒤흔든 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는 예술가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두 손에 놓고 주물럭 거리던 대부호도 아니었다. 그 당시 피렌체에는 또 한 명의 유명인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에야 유명인이지만 당시에는 말단 공무원에 불과했던 남자. 1988년, 피렌체 근교의 한 산장에는 눈을 지그시 감은채 이 산장의 주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곰곰히 그리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여타 지중해 시리즈와는 달리 소설이 아니다. 구체적 사실을 늘어 놓는 다는 점에선 '로마인 이야기'와 닮아 있지만 그 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가 평생을 걸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에게 있어 마키아벨리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그녀는 60년대 일본의 학생 운동이 실패로 그치자 이탈리아로 넘어와 역사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혁명 실패로 인한 사상의 공허, 헛헛한 마음의 공백을 인간성의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냉철하게 그리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채웠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에 대해 '자신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녀는 목적과 수단을 단칼에 분리하는 명쾌함에, 악한 일을 해 놓고 '악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솔직함에 마키아벨리의 팬이 되었다.

사실 마키아벨리라 함은 우리에게 있어 협잡과 기회주의, 아첨과 아부를 상징하는 전형이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이를 부끄러워 할 필요 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뻔뻔함. 권력층의 비위를 맞춰 한 몫 잡아보려는 천박한 공명욕.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입신양명을 위한 뇌물같은게 아니었다. 물론 공직에서 파면된 후에 평생 복직을 바라며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복직을 원하던 직책은 피렌체 제2서기국 서기관,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오늘날 행정 부처의 실무 과장쯤되는 말단직에 불과했다. 고작 정부 부처의 말단 행정직을 얻어내기 위해 그토록 위험한 책을 썼단 말인가? 군주론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던 한 남자의 뛰어난 정치사상서였다.



                                <군주론의 모델이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



편집증에 가까운 시오노 나나미의 디테일은 이러한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저명한 사실에서부터 저명하지 않은 사실까지, 모조리 잡탕된 역사의 웅덩이 안에서 그녀는 사실과 정황적 증거를 조합해 조목조목 마키아벨리에 대한 변론을 시작한다. 이 디테일은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특히 계약금을 챙긴 뒤 그림을 완성하지 않고 밀라노로 튀어버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계약금 반환을 요청하기 위해 출장을 떠나는 모습, 그리고 출장비가 적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상사에게 출장비 증액을 요청했던 마키아벨리의 일화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된다.

오늘날에야 '군주론'의 유명세 탓에 마키아벨리를 굉장한 엘리트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마키아벨리는 대학을 나오지도, 집안이 훌륭하지도 못했다. 그는 평생 일을 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이런 가장이, 귀족들의 눈에는 코끼리 눈꼽만치도 못한 말단직을 얻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실을, 400년이 지난 오늘날 취업과 승진을 위해 이보다 더 뻔뻔한 일도 서슴치 않는 우리가,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마키아벨리의 절친이었던 프란체스코 베트리는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로서 교황을 보필하는 직책에 있었다. 또 다른 절친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또한 명문가 출신의 스페인 대사였다. 둘 모두 피렌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피렌체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행정 실무가로서, 외교관으로서, 정치사상가로서 이 두 귀족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을 지녔던 마키아벨리의 직책은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다.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지만 타고난 재능까지 폐기된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독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쓰임 받지 못하는 남자의 괴로움을 안다. 누구보다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지만 끝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배우의 눈물을, 나는 안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그다지 큰 야망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원했던 직책은 끝까지 로마 대사도 스페인 대사도 아닌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했기에 그의 절망은 더더욱 처참했던게 아닐까?


                                                        <니콜로 마키아벨리>


1527년 5월, 자신을 중용하지 않았던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시 구이차르디니의 부탁으로 교황군에 합류해 있던 마키아벨리는 친구에게 상황을 알리지도 않은 채 곧장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해 6월 마키아벨리는 부활한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국 서기관으로 입후보한다. 결과는,

찬성을 의미하는 흰 강낭콩을 던진 자 12명.
반대를 의미하는 검은 강낭콩을 던진 자 555명.

반대표를 던진 사람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知)의 사람이 아니라 충(忠)의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p. 564)


지(知)의 사람 마키아벨리는 그로부터 10일 뒤 병으로 쓰러진다. 이틀 뒤인 1527년 6월 22일, 마키아벨리는 죽었다. 세상의 빛을 본지 58년 하고도 1개월이 되던 해였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죽음이 뛰어난 평민의 능력을 시시콜콜하게 여긴 귀족들의 간접 살인이었다고 생각한다. 평민 하나가 죽든 말든 그 놈이 능력이 있었든 없었든 부모 잘 만난 탓에 온갖 혜택을 누렸던 귀족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대체할 사람이야 얼마든지 넘쳐나니까. 이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나는 분통이 터지고 치가 떨린다.

내가 400년도 더 된 한 남자의 죽음에 이토록 광분하는 이유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되는 그가 웬지 우리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걸 요즘 어렴풋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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