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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아마 이렇게 조용하고 심심한 곳일거야 - SRH1840 리뷰 본문

음악

천국은 아마 이렇게 조용하고 심심한 곳일거야 - SRH1840 리뷰

WiredHusky 2012. 5. 18. 21:03




올 것이 왔다. SHURE의 최종 병기 SRH1840. 듣는 순간 느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걸. 그리고 알았다. 천국은 이렇게 조용하고 심심한 곳이라는 걸.

이 헤드폰을 귀에 대고 있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간다. 그곳은 아무런 저항도 색도 자극도 없는 곳이다. 음악은 초전도체처럼 땅 위에 떠서 등속으로 움직인다. 감히 그 소리의 전진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순백의 세계 위에 떠 있는 완벽한 백색 구체. 



Grado를 표현주의의 마티스로, AKG를 르네상스의 다 빈치라고 말할 수 있다면 1840은 절대 추상의 말레비치다. 캔버스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 사각형 하나. 오로지 순수한 회화에 가 닿고 싶었다는 이 화가의 이상은 100년이 지난 오늘 어느 음향 회사의 헤드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내 앞에 다가왔다.



SHURE가 위대한 점 하나. 패키징의 간지가 쩐다. AKG나 Beyerdynamic과는 비교 조차 되지 않는다. 고급 제품을 팔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1440때도 놀랐지만 이 오픈형 헤드폰 시리즈의 패키징은 다른 회사, 다른 제품들과 확실한 선을 긋는다. 몸체가 사라져도 박스만큼은 그대로 남겨 두고 싶은 제품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애플의 아이폰이고 또 하나는 바로 SHURE 1840이다.

또 하나의 위대한 점. 착용감이 대단히 훌륭하다. 아무리 좋은 쿠션을 깔고 아무리 인체 공학적 설계를 했대봤자 결국에는 정수리 압박을 피해갈 수 없었던게 이 급의 헤드폰들이 가진 공통의 한계였다(AD 시리즈는 제외하고). 하지만 1840은 고급 쿠션과 설계를 떠나 무게 자체가 가볍다. 이게 핵심이다. 가볍기 때문에 별다른 비결 없이도 훌륭한 착용감을 보여준다. 



해상도는 더 이상 얘기 하지 말자. 기가 막힌다. 스튜디오에 날아다니는 먼지의 소리까지 잡아낼 듯한 기세다. 맑다거나 깨끗하다는 말이 모욕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고음과 저음의 잔향감이 좋다. 깔끔하게 정리된 스테이지에서 연주되는 솔로 기타 소리는 연기처럼 자욱히 퍼지며 마음 속에 우아한 자국을 남긴다(Tom Waits, 'Blue Valentine'). 베이스는 결코 나서는 법이 없지만 단단한 무게를 앞세워, 그야말로 베이스(Base) 저 밑 바닥에서 부터 들려오는 중후한 울림을 선사한다(RHCP, 'Scar Tissue'). 

하지만 타격감이 좋은건 아니다. 서부 시대의 강도가 되어 흔들리는 말 위에 앉아 기차를 추격하는 것 같은 다이나믹은 없다. 하지만 그런건 너무 자극적이야. 지옥에서나 들을 법한 음악이라고.

1440도 그랬지만 이 SHURE의 오픈형 시리즈들은 공간감에서 확실한 한계를 드러낸다. 횡으로 확보되는 공간은 확실히 좁다. 하지만 음과 음간의 거리가 그리 짧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각각의 음을 대각선 위, 아래, 앞, 뒤로 배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엔 입체감이 살아 있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달리는 건 아니지만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집이 있는, 마치 안분지족의 삶을 권고하는 듯한 뚜렷한 공간의 한계. 이게 이 시리즈의 색깔인가 보다. 

그런데 이 공간의 한계가 클래식 음악에서 필살기가 된다. 오케스트라 같은 대규모 구성에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현악기가 포함된 소구성에서는(Astor Piazolla의 탱고곡들) 확실한 강점을 보여준다. 도대체 악기가 어디서 울리고 있는지 그 공간을 선명하게 찍어주는 정확함. 아마 인터넷에서 구글 스트리트뷰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이랬을 것이다. 

각 음역대의 재현은 완벽하다. 어느 쪽으로의 치우침도 없다. 붓다가 바라보고 앉자 마침내 어느 땅도 치우침없이 균형을 찾았다는 동방정토가 생각난다. 하지만 미세하게 보컬의 처짐이 느껴진다. 귀에서 약간 멀다. 좀 뒤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다.

곰곰히 앉아 이 헤드폰을 듣고 있자니 문뜩 SHURE의 첫 헤드폰이 생각났다. SRH240. 어떻게 보면 1840은 30년간의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온 240 같은 느낌도 든다. 다이나믹이 부족해 심심하고 밋밋하지만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가능성 많은 천재 아이. 그 포텐이 터진게 바로 1840이라면 지나친 비유일까?

온갖 미사여구로 보는 이를 홀리려했지만 1840의 가장 큰 특징은 입체감도 고음도 밸런스도 아니라 '심심함과 조용함'이다. 음식에도 이런 류가 하나 있다. 바로 평양 냉면. 평양 냉면은 우리가 흔히 먹는 냉면들처럼 감칠맛과 달콤 시큼함이 없지만, 그 맛에 한 번 빠진 사람은 두고두고 찾게 된다. 바로 나!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은 아마 싱거운 맛일 것이다. 이 미각 세계의 아이러니함을 그대로 갖고 있는게 바로 SRH1840이다. 하지만 평양 냉면이 그렇듯이, 이 소리에 한 번 길들여진 사람은, 어느 마약과도 이 소리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p.s -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1840을 듣고 있으면, 마약을 하는 기분이 이런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웬지 이 헤드폰은 밤보단 낮에 더 좋은 소리를 내 주는 것 같다.

날 미쳤다고 욕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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