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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_냉소와 회의로 이글대는 태양

WiredHusky 2018. 9. 23. 12:11





이언 매큐언은 냉소와 비아냥의 천재다. <넛셸>이후 그를 완전히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솔라>는 그 다짐이 무너지지 않으리란 걸 확신하게 만들어줬다. 열기대신 차가운 냉소와 회의로 이글대는 태양. 제목에서부터 골수 회의주의자의 존경할만한 악취미가 느껴진다.


주인공 마이클 비어드는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다. 결혼을 네번했고 그때마다 본인의 외도로 이혼을 했다. 네번째 결혼은 만만치 않았는데 마이클의 외도를 눈치 챈 아내가 당당히 맞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질투심에 휩싸인다. 뭐? 지금까지 자신이 상처줬던 모든 여자들의 마음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는 이 남자는 아내의 외도남을 찾아가 그 부도덕함을 훈계하려 한다. 마이클이 얻어낸 건 외도남의 속죄대신 눈이 번쩍이는 주먹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마이클은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가까스로 위기를 탈출한다.


어느날 해외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 마이클은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목욕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앉아 있는 - 그 속은 분명 나체였던 젊은 연구원을 발견한다. 마이클은 아내에게 그 연구원을 딱 한 번 소개해준 적이 있다. 더 파렴치한 외도로 아내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리라 계획했던 마이클 비어드의 전쟁은 이 대목에 이르러 그야말로 대패를 하고 만다. 한때는 천재라 불렸던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하지만 이제 걷기도 힘든 돼지로 늙어버린 남자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마이클에게 달려오던 젊은이가 카펫을 밟고 미끄러져 유리 탁자에 빅뱅을 일으킨 순간 그의 머릿속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마이클 비어드에겐 두 개의 사실이 있다. 하나는 아내의 외도남이 자기 집 침실에서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침실에 자신을 때린 또 다른 외도남의 흔적이 가득하다는 것.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과학자 마이클 비어드는 이 두 개의 사실을 융합해 하나의 복수를 만든다.


<솔라>는 태양열을 이용해 에너지 혁명을 일으키려는 한 물리학자의 삶을 그리지만 과학 소설은 전혀 아니다. 소설에는 태양보다 더 들끓는 추한 욕망의 인간들이 등장한다. 마이클은 아내의 외도남이자 죽은 연구원의 연구자료를 훔쳐 에너지 혁명의 싹을 틔웠음에도 그것이 100% 순수한 자신의 연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솔라>는 천재적인 희극배우가 비극의 밧줄 위를 외발 자전거로 달리는 듯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절대적 비극을 향해 치닫지만 천재적 희극 배우의 우스꽝스런 연기가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잊게 만든다. 도대체 얼마나 인간 본성에 회의적이어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를 이토록 회의적으로 만든 건 도대체 어떤 사건과 경험일까? 이언 매큐언은 내가 걷는 길의 끝에 서 있는 거대한 산같다. 나는 감히 그 산을 오르려하지만 아직 그 밑에도 도착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들은 긍정적 태도와 행복한 말들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믿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나는 오히려 비관주의자만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단 한톨도 믿지 않는 회의주의자만이 이 세상에서 찰나나마 구원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뒤틀리지 않은, 고귀한 생각의 그들은 악으로 들끓는 이 세상에 매번 배신감만을 느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인간은 선하다는 맥없는 자위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반대에 서 있는 우리는, 뒤틀린 괴물이라 손가락질 받는 우리는, 바로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악으로 들끓는 이 세상에 찰나처럼 스쳐지나가는 선의 불씨에도 기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선한 행동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당연한 일이라면 우리가 왜 거기에 감사를 표해야 할까? 나는 인간이 본디 악하다고 믿기에 가뭄에 콩나듯 보여주는 그들의 선의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이 세상에서 기적을 경험하는 건, 오직 회의주의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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