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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을 태우다_진정한 관계가 정말로 영혼을 살찌울까?

WiredHusky 2018. 7. 22. 16:57






이 단편집에는 아주 중요한 소설 두 개가 담겨 있다. 하나는 <상실의 시대>의 프리퀄이라 볼 수 있는 <반딧불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화 <버닝>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이다. 두 작품 모두 하루키의 전매특허인 부유하는 인간들의 피상적 관계 맺기가 그려진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잃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하루키 특유의 허세라거나 같잖은 센티멘탈로 치부하는데 나도 이런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역시 같은 책에 수록된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의 일부를 인용하면, 하루키는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정경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너무 사실적인 정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정불변의 판단을 강요한다. 예컨대 우리 눈 앞에 코카콜라 병이 나타난 순간 우리는 그것을 코카콜라 병 이외의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하나로 뭉쳐진 정경으로 제시된다면, 우리는 그 모호함으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마주하게 된다. 의미의 범람은 혼란이 아니라 축제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말.


사람들은 뿌리 없이 부유하는 삶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 태도를 갖고 있지만 나는 글쎄, 그건 그대로 꽤 괜찮은 삶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각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강해진다. 나에게 관계란 말은 너무 뜨겁고 그 열기는 언제라도 나를 질식시킬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이 좀 더 차가워졌으면 좋겠다. 부유하는 삶에 밧줄을 던져 자꾸만 땅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유유히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말에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하루 빨리 진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타인은 타인일 뿐이다. 이 진실의 허무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강하게 서로를 잡아당겨 그 공허를 메우려하지만 서로의 숨통을 더 옭아맬 뿐이다. 우리는 결국 혼자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관계는 늘 폭력으로 변질될 위험을 잉태한다.


<헛간을 태우다>의 '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땅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헛간들, 속이 텅 비었고 언제든 다시 짓거나 허물어 버릴 수 있는 헛간, 즉 부유하는 인간들을 언제나 내 눈 앞에, 내 손과 발이 닿는 곳에 놔두려 한다. 아프리카 남자가 나와 아주 가까운 헛간을 태우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헛간을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그 주위를 달린다. 그는 애초에 잡아둘 수 없는 것들, 잡아 둬선 안 되는 것들을 잡아두려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남자는 헛간을 태우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옳은 일이며 심지어 헛간은 자신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헛간을 태운다는 의미는 유유히 부유하려는 삶을 끝끝내 땅 위에 매어 두려는 세상의 온갖 시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뜻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남자를 악당으로, 심지어 그가 그녀를 죽인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독이 되는 사람은 오히려 '나'다. 쿨한척 가벼운 만남을 즐기는 것 같지만 '나'는 이미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헛간(그녀)를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수 킬로미터를 달리며 그녀로부터 연락이 끊어지자 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아프리카 남자는 그녀가 '나'를 정말로 신뢰한다고 말한다. '나'와 그녀 사이에 이미 재앙의 싹이 튼 것이다. '나'와 그녀는 유부남과 미혼녀라는 사회적 관계를 초월해 진정 인간대 인간으로, 존재대 존재로, 한 영혼과 영혼으로서의 관계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부유하는 삶을 마치고 단단한 땅 위에 뿌리를 내려 시간의 물결에 씻겨나가지 않도록 서로의 존재를 지킬 수 있었을까?


나는 세상이 좀 더 쿨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재를 옭아매는 건 언제나 타자의 존재다. 관계는 결코 영혼을 살찌울 수 없다. 누군가와 쌓은 신뢰를 영원히 지키는 법은, 애초에 신뢰를 쌓지 않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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