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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PXsociety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은 셜록 홈즈다. 아서 코난 도일의 만들어낸 이후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그렇게 믿었고 그 자손들이 믿음을 이어 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믿음은 전설이 됐다. 셜록 홈즈를 번역한 나라가 이 전설에 동참했다. 번역한 나라의 자손들이 그 말을 이어나갔다. 번역의 불길은 황무지와 살인, 런던과 대저택, 스릴러와 추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극동 아시아의 남조선에까지 번져 급기야 열린책들 '세계 문학'의 102번째 시리즈로 '바스커빌가의 개'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에 작은 사무실을 갖고 있던 셜록 홈즈는 이렇게 전세계적인 탐정 신화를 완성해 냈다. 고전의 아우라는 언제나 후세들의 가치관에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 사람이 누구든 고전을..
루쉰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치고는 꽤 재기 발랄한 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핍박 받는 인민과 핍박 받는 인민을 핍박하는 옆 집 인민이 등장하는데, 그 관계를 묘사하는데 있어 가끔 블랙 코미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유머가 존재한다. 그의 대표작 아Q정전을 보자. 이 소설은 아Q의 내력을 장황하게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내력을 정리하여 '전(傳)'으로 써낸 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거나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인물에나 어울리는 일이다. 그런데 아Q가 누구인가? 거렁뱅이에 무뢰한이다. 루쉰은 거창한 형식 속에 비루한 소재를 채워 넣고 있다. 그리고 이 과잉된 서론이 독자들의 마음을 적당히 풀어지게 한다. 루쉰의 코미디가 서서히 시동을 거는 것이다. 코미디의 절정은 아Q가 위기를 극복하는 ..
올 한해 동안 100여편의 글을 쓰면서, 상당부분 책에 대한 얘기를 해왔고, 몇몇 책에 대해선 과도한 찬양을 일삼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책을 찬양하는데 있어선 일말의 망설임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남겨 두고 싶지 않다.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이다. 벌써 세 번째 이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은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는데 있어선 러시아의 도박광 도스토옙스키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이고, 삶의 희비극을 묘사하고 조소하는데 있어선 안톤 체홉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정도지만, 무엇보다 평등과 자유를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 풍의 서사시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과 사상 그리고 전 인류의 해방과 평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뭐 ..
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할 능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줄거리 정도는 가능할 지도. 세상에 종말이 왔다. 나무와 들이 불타고 강과 바다가 썩었다. 온 땅과 온 건물과 온 사람의 위로 회색의 재가 켜켜히 쌓여 있다. 태양은 눈이 멀었다. 건물은 구조를 잃었고 남아있는 목재는 장작으로 타올라 잿빛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불길은 어두컴컴한 하늘에 한 줄기의 빛도 보태지 못했다. 대낮에 하얀 입김이 서렸다. 추위로 몸을 떨었다. 차가운 대기 위로 얼음같은 눈과 비가 내렸다. 인간이 인간을 먹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잿빛 세계의 음침한 얼굴이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매일매일 죽음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걸었다. 권총에 두 발의 총알이 있었는데 한 발이 약탈자..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나 타인의 삶에 적대적이다. 몇 가지 예. 탁란으로 부화한 뻐꾸기가 둥지 밖으로 작은 새의 알을 필사적으로 밀어 내는 모습. 짐승의 세계에선 원래 그렇다고? 또 다른 짐승의 예.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은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을까? 하나님과 알라는 같은 신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에게 서로 다른 명령을 내렸다. 이걸로 수 백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창 끝에 피를 흘려야 했다. 승자가 얻은 것은 고작 이백년 남짓, 코딱지만한 예루살렘 땅을 차지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비교적 이성적이었다. 그들의 신은 서로 달랐으니까. 아테네가 보기에 아폴론이 심히 역겹다면 부하들을 시켜 침을 뱉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 유일신, 이 정신분열증을 앓는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것이 첫 문장. 그러고 난 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에 대한 모든 감상은 이 두 문장에서 나온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시마무라는 한량이다. 니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라 불리는 온천 마을에 들렀을 때 고마코를 만났다. 고마코는 게이샤. 처음 볼 때 부터 웬지 시마무라의 마음에 와 닿았다. 그건 고마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알고 있겠지? 여행자와의 사랑이란 예정된 이별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는 기관차 같다는 것을. 요란하게 기적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달려보지만 절벽 위의 철교는 언제나 중간에서 끊겨 있지. 남아 있는 것은 추락 뿐이야. 잔인한 건 이 사실을 남자는 알고 여자는 모른다는 것. 시마무라의 마음 속은 커다랗게 비어 있는 공동이라 ..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사람들은 글을 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노통의 신간 '겨울 여행'은 프랑스 전력 공사에 다니는 남자 조일이 자폐증을 앓고 있으나 천재적인 소설가인 알리에노르를 보살피는 천사 아스트로라브와 겪는 영혼의 쇼크 현상을 담아내고 있다. 요약하면, 사랑 이야기. 조일은 직업상의 이유로 이제 막 이사를 마친 고객의 집을 방문한다. 그 곳에서 아스트로라브를 만났다. 한 눈에 반했다. 한눈에 반했다는 것, 그래 이거야 말로 인간사 그 캐캐묵은 문제 덩어리의 발상지임을 나는 이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조일과 아스트로라브의 사랑은 괜찮았다. 문제는 알리에노르였다. 아스트로라브는 한 시도 알리에노르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알리에노르는 자페증을 앓고 있었고 아스트로라브의 보살핌 없이는 정상..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야 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의 본질이라고 나는 쓴 바 있다. 2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 동남 아시아의 한 열도에서는 태평양 너머의 백인들을 위해 기발한 쇼를 기획 중이었다. 제군들! 전 아시아의 산업과 전 아시아의 미개한 인종들이 바로 우리의 지배 아래 비로소 개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머나먼 동쪽에서 적국의 함선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함대는 거대하고 무참합니다. 제군들! 신이 바다를 들어 적함을 깨부쉈던 역사를 기억하십니까! 이번엔 여러분들이 제로센 비행기를 타고 혈혈단신, 적군의 항공모함에 온 몸을 부딪힐 예정입니다. 제군들! 신의 바람을 불러 봅시다. 신민들이 대답한다. *'텐노-헤-카반자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제군들! ..
인조 14년, 후금의 태종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으로 바꿨다. 조선에 군신지국의 예를 요구했다. 대의의 나라 조선, 기개가 높았으나 말이 더 높아 창검이 아닌 혀로 싸우는 나라. 조선의 임금이 8도에 임전태세를 명해 결전을 다짐하자 후금의 태종은 몸소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한다. 북방의 칼바람에 단련된 철병에겐 조선의 겨울이 낯을 간지르는 미풍에 불과했었나 보다. 압록강을 넘은지 12일째, 서울이 점령 당했다.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그 길 또한 막혀 있었다. 사대부와 약간의 관군, 도처에서 모여든 향병을 이끌고 인조는 남한산성에 둥지를 튼다. 개전 14일째,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화친을 거부했다. 임금의 성은은 높았고 야만국의 황제는 비천했다. 각도에 ..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은 아멜리 노통의 작품 중 최고다. 나는 '제비 일기' 따위, 그녀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는 문제작까지 읽은 바이므로 이 말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노통의 소설엔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과 순수한 허구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 둘 사이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심한 차이가 있는데 주로 전자는 뛰어난 작품이고 후자는 짬뽕 국물을 뒤집어 쓴 페르시아 고양이처럼 흉물스런 이야기 들이다. 그리고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 중에서도 바로 이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광채로 노통의 필모그래피를 반짝 반짝 빛내고 있다라고 하는 얘기는 이젠 너무 구차한데다가 상투적이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으며 더 이상 문장을 늘였다간 나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