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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가 온다_전학수는 너무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였다. 본문

검은 개가 온다_전학수는 너무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였다.

WiredHusky 2018. 8. 26. 11:14





탄탄한 짜임새와 소소한 재미를 준 <달리는 조사관>을 읽은 뒤 같은 작가의 장편이 읽고 싶어진 이유는 연작 소설에서 보여준 짜임새가 장편에서 어떻게 유지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편만의 호흡, 장편만의 플롯. 엽기 살인도, 천재적 탐정도, 억지 트릭도 등장하지 않는 한국형 미스테리의 독자적 구현. 바로 이런것들이 검은 개를 쫓게 한 동기였다.


무관한듯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절정에서 만나 분수처럼 폭발하는 구성은 이 책의 역량을 평가하기에 아주 좋은 구성이었다. "전학수는 너무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였다."는 첫 대사는 <검은 개가 온다>에 대한 기대감을 폭발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어떤 책에서도 본적 없는 강렬한 시작이었다. 수줍음 살인으로 물꼬를 튼 이야기는 어느덧 산에 묻힌 백골과 함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두 강물의 만나는 지점에서 물줄기는 비로소 막을 수 없는 대하가 될 것이었다. 나는 그 조류에 휩쓸려 미친듯이 페이지를 넘길 일만 기대하며 천천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세상에, 아무리 큰 뜻이 있다지만 강물은 좀처럼 속도를 붙이지 않았다. 기다리자. 저 멀리서 또 다른 강물이 이쪽을 향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물이 이 물과 만나는 순간 필시 강물은 놀라운 기세로 나를 몰아세울 것이다. 그 바람이 두 손 가득 움켜 쥔 물처럼 부질없이 사라져버렸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인 전학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야기는 가뭄을 맞은 냇물처럼 서서히 말라가다 겨우겨우 산에 묻힌 백골의 강을 만난다. 그러나 두 개의 큰 강이 만나 대하를 이룰거라는 기대감은 이미 박살이 난 뒤였다. 전학수는 서브 플롯에 불과했고 목마름을 달래줄 백골은 고만고만한 형세를 유지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태풍 솔릭처럼 검은 개는 허옇게 털이 새고 있었다.


이야기를 묵직하게 만들기엔 캐릭터들이 너무 단편적이었지 않나 싶다.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숯검댕이 눈썹 박열은 그 부리부리한 눈썹을 제외하고는 거의 보여준 게 없었다. 범인의 말마따나 그는 그저 성실하고 똑똑한 모범생에 지나지 않았다. 복잡다단한 사바 세계를 헤쳐나가기에 그의 사상은 너무나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그렇다고 범인이 입체적이었던 건 아니다. 범행의 동기는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았고 범행 자체도 너무 손쉽게 이뤄지는 경향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예찬과 독특한 사상은 그 자체로는 충분히 매력적이긴 했지만 빨갛게 익은 사과에서 떫은 맛이 나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범인은 타인의 감정을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있는 천재 싸이코패스였을까? 범행 대상이 아무리 중등도 우울증을 앓는 환자라지만 말 한마디로 손쉽게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지나고 보니 단편 소설에선 장점이라고 생각됐던 소소한 재미와 단순한 캐릭터가 장편에 와선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장편은 장편 나름의 구성과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마치 단편 소설을 쭉 늘려 놓은 것처럼 이야기는 긴장감을 갖지 못했다.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인 것 치고는, 꽤나 아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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