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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PXsociety
자금성은 환관과 궁녀의 좌표일 뿐이고, 창업 군주인 황제는 정작 변방에서 온다.(p.5) 첫 문장이 눈에 들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대업을 이룬 힘은 천년만년 그 기세를 유지할 것 같지만 거짓말처럼 몰락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경치를 만끽하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전성기가 도래했다는 말은 곧 몰락이 시작됐다는 말과 같다. 대륙의 통일을 이룬 권력이 스스로 중앙을 칭하는 순간 변방에선 또 다른 혁명이 잉태된다. 한편 저 문장은 중앙과 변방을 나누는 게 합당한 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수도의 위치인가? 인구수인가? 경제력인가? 아니면 군사력? 문화? 따지고 보면 모든 곳이 중심이 될 수 있는 동그란 행성의 거주민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웃기기도 하다. 창업 황제들의 힘은..
이 책은 아주 흥미로운 멍게의 삶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멍게는 제법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멍게 유생은 바다를 헤엄치고 다니다 경치 좋은 바위를 찾으면 휴식을 위해 자리를 잡은 뒤 성체로 변태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남은 평생을 거기에 눌러 앉는다. 이런 정착에는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어린 멍게에게는 매우 단순하지만 뇌가 있고, 꼬리까지 이어지는 신경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일단 살 곳을 찾으면 멍게는 모든 신경계를 소화해버리고, 다시는 그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 않는다. '일회용 뇌'라는 이 흥미로운 사례는 우리가 대체 왜 신경계를 갖고 있는지에 관한 힌트를 준다."(p.19~20) 인간의 뇌는 움직이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 차례 놓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도 가볍게 걸을 수 ..
인간 사회는 일관성을 신뢰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는 직장상사나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최악의 인간상에는 이렇듯 태도나 의견을 손바닥 뒤집듯 태연하게 바꾸는 사기꾼들이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리는 순간 정신을 옭아매는 굴레가 된다. 예컨대 자신의 의견이 명명백백 틀렸다는 증거가 사방에서 쏟아지는데도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옥을 향해 돌진하는 답답이들을 본 적 있지 않은가? 뚝심 있는 예술가, 장인, 사업가는 늘 존경의 대상이지만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그 뚝심 때문에 인생을 조진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의 핵심 주제는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나 의견을 버림과 동시에 사고에 ..
은 히어로 소설이다. 치밀하게 엮인 이야기가 시공간에 걸쳐 가지를 뻗으며 다차원 우주의 흥미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풀어낸 전우주 대하소설이라고 하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정세랑 특유의 사소함이 겉면을 살살 핥으며 일상에 둥지를 트는 '평범한 초인'들의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리 진지하고 거대한 주제라도 정세랑의 손에만 들어가면 탈탈 털려 빨랫줄에 걸린 무릎 나온 츄리닝이 되는 것 같다. 씹덕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게 모에화 된달까? 물론 근사한 곳에 이 바지를 입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을 입을까 옷장을 연 순간 거짓말처럼 손이 가는 게 바로 이 츄리닝이다. 입은 것 같지 않게 편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과한 세제 냄새 없는 피부 같은 옷.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강박증 환자라도 정세랑의 ..
정치 세계에서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정치인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념, 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원천. 신념이 없는 사람이 어떤 큰 일을 해내리라 상상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신념만 가진 사람이 큰 일을 해냈을 땐 예외 없이 인류사에 재앙이 닥쳤던 것도 사실이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조지프 매카시,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메르켈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합의와 소통이다. 이는 반드시 연정을 해야 하는 독일 정치의 특성상 불가피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해석하기엔 앙겔라 메르켈이 무려 16년이나 독일 총리로 재임했다는 사실을 충분이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과학자에 가까웠던 그의 정체성이 가장 큰 힘이 아니었..
인간의 역사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해왔다. 은은한 망각의 향은 순식간에 역사를 채워 냄새나는 과거를 깨끗이 세탁한다. 앞선 세대가 기록한 역사적 범죄가 늘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사람들에 의해, 똑같이 행해지는 이유다. 이 바보 같은 연극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눈을 번쩍 뜨고 늘 과거를 주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특히 더 중요하다. 역사를 지우려는 세력과 기록하려는 이들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고개를 과거로 돌리는 것도 힘든데, 돌아봐야 깨끗하게 지워진 백지뿐이라면 무엇을 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 범죄자들은 우리를 어두운 극장 속에 가둬 휘황찬란하게 미화된 역사를 방영한다. 우리의 눈이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는 동안 진실은 불타고 있다. 이건 아..
몇 번을 얘기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를 언급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배경과 진실을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결국 무지로 점철된 매도와 마녀사냥의 먹잇감이 되는데, 나는 대체로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우리와 국경을 마주한 가짜 사회주의 국가 때문이다. 삼대 세습을 완성한 이 나라는 사회주의의 'ㅅ'도 꺼낼 자격이 없는 무능력한 독재국가다. 이 나라에 사상이란 없다. 오로지 더러운 권력욕과 그걸 포장하려는 뻔뻔함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둘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근대사 탓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부역자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사회적 지위와 부를 보전받은 이들은 그대로 대한민국의 지배층이 됐고 과거를 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하는 건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다. 쪼개고 쪼개고 보면 인간이라는 복잡한 유기체도 다른 사물들과 동일한 입자의 조금 다른 배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가! 결말만 두고 보면 이 세상이 전지적 창조자의 꼼꼼한 기획물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절묘한 결과가 저절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지 않은가. 생명의 신비를 곱씹을수록 이 의심은 확신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는 이 세상이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약 46억 년 전 우주를 떠돌던 작은 먼지들이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알갱이를 이루고, 더 큰 중력을 갖게 된 알갱이가 다른 먼지들을 흡수하면서 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태양이었..
존 르 카레는 1931년 영국 도싯주 풀에서 태어났다. 이게 얼마나 옛날인지 알고 싶다면 1931년이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한 해라는 걸 떠올리면 된다. 존 르 카레는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옥스퍼드 장학생이 되어 언어학 공부를 추가했다. 1956년부터 2년간 그 유명한 이튼 스쿨에서 아이들에게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쳤다. 에서 정보부를 떠난 짐 프리도가 어느 시골 학교의 교사로 숨어 지내던 장면이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1959년 영국 외무부로 일터를 옮긴 그는 MI6에서 첩보 활동을 시작한다. 1961년 요원 신분으로 첫 장편소설 를 발표한다. 우리의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가 탄생한 책이다. 존 르 카레가 은행 직원에게 요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본인의 계..
의 압도적 힘에 이끌려 선택한 임프린트 엘릭시르의 소설 이다. 저자는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화산의 나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출신이다. 레이캬비크는 LCK의 담원 기아가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결승을 앞두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졌다). 아무튼. '남자는 아기가 바닥에 앉아 씹고 있던 것을 빼앗아 들자마자 그것이 사람 뼈라는 것을 알았다.'(p.5) 을 읽기로 결정한 건 바로 이 첫 문장 때문이었는데, 북유럽 특유의 그로테스크가 사방을 에워싸는 압도적 분위기를 기대했달까? 사실 끔찍한 살인 사건은 미국이 전문인 것 같지만, 북유럽을 배경으로 핏물이 번지면 더 섬뜩한 느낌이 있다. 날씨 탓일 수도, 희고 창백한 그들의 외모 때문일 수도 있다. 전부 스트레오 타입에 불과하겠지만. 은 첫 문장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