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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책 (720)
deadPXsociety
누군가에겐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게는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는 게 바로 그것이다. 저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국내에 소개된 작품만 고르면 더 줄어든다. 시간 순으로 보면 (1985), 일명 국경 삼부작으로 불리는 (1992), (1994), (1998),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 (2005), (2006), 최초의 영화 시나리오 (2013), 희곡 (2015), 마지막으로 이 책 (2021)가 있다. 매카시의 소설은 난해하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과거로 갈수록 심하다. 문체가 시적이라 상징이 많은 데다(매카시의 소설 속에선 멕시코 마약 카르텔 두목마저 셰익스피어가 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이어 붙여 문장을 길게 끌고 가는 탓에 읽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번역의 한..
가히 올해의 소설로 꼽을만한 이야기다. 구성은 김언수의 초명작 만큼 탄탄하고 재미 또한 어깨를 나란히 한다. 가 우세를 보이는 부분은 좀 더 현실적이라는 것. 그러나 에는 보다 한 뼘이나 웃자란 유머가 있다. 고등학교 소년 바람은 미혼모이자 마약 중독자인 엄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올바로 크는 게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환경이었지만 바람은 아주 성실한 소년으로 자랐다. 외박과 가출을 밥 먹듯 하는 엄마를 대신해 살림을 했고 매주 화요일에는 식기를 소독했다. 엄마는 병신과 머저리들만 골라 사귀는 재능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엄마를 구타하는 남자 친구들을 때려눕혀 몇 번이나 엄마를 구해냈다. 담배도, 술도, 욕도하지 않았다. 바람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얼른 커서 입대해 말뚝을 박고 봉급..
고요나는 여행사 정글의 패키지 프로그래머다. 정글은 재난 지역을 배경으로 한 여행 상품을 기획해왔다. 화산, 쓰나미, 지진, 허리케인, 원폭, 경제 재앙 등 삶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이 자연재해든 인재든 모두 정글의 패키지 대상이다. 요나는 그곳에서 10년 넘게 재난을 찾아다니고 그것을 상품화하는 일을 했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떠나야 할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요나는 직장 상사 김에게 노골적 성추행을 당한 이후 그 시간을 어렴풋이 느낀다. 김의 먹잇감은 늘 한물 간 퇴물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요나의 신고는 당연히 묵살된다(그것이 드라마의 암묵적 규칙이다). 회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이자 해당 문제를 처리할 의무가 있는 최는 요나에게 조용히 넘어갈 것을 권고한다. '김좆광!' 그 쓰레..
는 왕조 500년간 조선에 닥친 위기에 역대 왕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평가한 책이다. 조선에는 태조에서 고종까지 총 26명의 왕이 있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왕은 10명 남짓이다. 위기란 대응에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배울 게 있는 법인데 26명 중 반도 안 되는 수가 등장하는 걸 보면 나머지 왕의 치세 기간에는 위기가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뽑아 먹을 게 없었던 모양이다. 이 책은 리더의 선택에 초점을 맞춰 위기 대응법을 논한다. 이런 책은 논지가 명확하다는 장점이 있다. 누가, 어떻게 해서 위기를 벗어났는가. 답안이 단순 명료하다. 다만 그만큼 생각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다. 도저히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의 해답을 봤을 때 이게 이렇게 쉬운 문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기지마 가나에는 도쿄의 유명 요리교실을 다니며 요리를 익혔다. 그곳 여자들과는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가치관이 크게 달랐기 때문인 듯하다. 기지마는 신화화된 모성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거대한 대지가 만물을 품듯 피로와 외로움에 지친 남자를 보살피고 그들이 보내는 절대적 숭배로 자기 존재의 의의를 증명한다. 여기에는 전근대적 세계관이 자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나기에 그런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우월감이 존재한다.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아무리 커도 걔들은 애야. 기지마의 이런 세계관은 민감했던 청소년기에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조숙했던 그녀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여성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물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답을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질문 자체를 떠올린 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동물을 먹는 게 당연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부당한 권력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습관처럼 전혀 의식되지 않지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을 속속들이 정해놓는다. 우리는 이 이름 없는 이데올로기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죽을 때까지, 눈을 가린 채 걸어 나간다. 이미 내면화된 삶의 규범을 떨쳐내기 위해선 그것에 이름을 붙여 세상 밖으로 꺼내야 한다. '육식주의(carnism)'란 말이 탄생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김춘수의 으로 인해 이름 붙이기란 행위는 우리에게는 퍽 낭만적으..
2006년 크리스토퍼 뉴포트 대학에서 물리학 학위를 받은 랜달 패트릭 먼로는 그 해 짧은 기간 미국 우주 항공국에서 계약직 프로그래머이자 로봇 공학자로 일한다. NASA가 그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은 게 먼로의 의지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2006년 NASA를 나와 그는 풀타임 웹툰 작가로 살아가게 된다. 땅도 넓고 사람도 많은 나라. 워낙에 기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물리학과 웹툰이라니, 그것도 그냥 물리학과를 졸업한 수준도 아니고 NASA에서 일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만화를 그린다니 좀 놀랍기는 하다. 물론 그의 그림체를 보고 나면 납득이 되기도 하지만. 코믹 웹툰 xkcd의 성공으로 이름을 얻는 먼로는 몇 권의 책도 내놨는데 이 그중 하나다. 이 책은 독자들이 보내온..
퇴마라면 따지지 않고 보는 편이다. 문제는 책이든 영화든 퇴마 이야기가 굉장히 드물다는 점이다. 책으로는 사실상 이후 읽어본 기억이 없지만, 이 소설은 사실 '퇴마' 보다는 '현대 무협 판타지'로 보는 게 더 맞지 않나 싶다. 물론 논란의 여지없는 대 명작 임에는 분명하지만. 영화로는 종종 나오는 편이다. 그러나 여기도 귀신 얘기 말고 '퇴마'로만 한정했을 땐 상당수가 제외되는 게 사실이다. 기억나는 걸 시간 순으로 적어보면 , , 정도다. 그나마 장재현이라는 오컬트 마니아가 한국 영화계에 저 두 편을 던져놨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휑했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아!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이라는 동종의 영화가 개봉했는데 여기에는 찰나의 눈길조차 주지 말자. 그러니 내가 라는 제목을 봤을 때..
안정효의 이후로 이렇게 재미있는 글쓰기 책은 처음이다. 교정 교열자로 일하며 저자와 겪었던 특별한 경험과 원 포인트 레슨 문장 다듬기가 번갈아 나오는데, 앞쪽은 무슨 추리 소설을 읽는 마냥 흥미진진하고 뒤쪽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충고로 가득하다. 얼마 전 읽은 은 같은 작가가 썼음에도 좀 지루한 데가 있었다. 보편적 법칙을 다루기보다는 개별 단어에 집중하다 보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어색한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조목조목 밝혀 글을 쓸 때 무엇을 넣고 빼야 하는지, 무엇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명확하게 가르친다. 진정으로 유용하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 우선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접미사 '-적'과 조사 '-의' 그리고 의존 명사 '-'것', 접미사 '-..
누군가가 1990년을 사는 나에게 "당신은 2020년이 되면 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할 거요"라고 말했다면 난 웬 말 같지 않은 소리냐고 했을 거다.(p.9) 토마 피케티가 막 성인이 되던 해에 동유럽 공산주의 독재국가와 함께 '진짜 사회주의'가 몰락해버렸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을 주장했던 공산주의의 숭고한 정신은 무능한 독재자들에 의해 오해를 사고 더럽혀졌지만 실패와 몰락이라는 조롱은 모두 그 멍청이들이 아닌 공산주의에 달려가 붙었다. 이후 자본의 폭주를 막아 세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아니 심지어 분배라는 말만 들어도 저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나 보잘것없는 배급으로 가난에 시달리는 인민들을 떠올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정부의 개입은 무조건 악이었고 복지 예산의 증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