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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PXsociety
가난을 겪는 사람의 삶에서 공동체의 질서와 문화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생존은 생존 외에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도록 강한 압력을 행사한다. 가난한 사람은 더 우악스럽게 보인다. 무식해 보인다. 표정은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잘못 건드렸다간 칼부림이 날 것 같다. 가난은 좁은 시야를 만든다. 총체적 사고를 베어내고 절박을 심는다. 그래서 사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잘 작동한다. '저러니까 가난하게 살지'는 대부분 틀린 말이다. '가난해서 저렇게 사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커다란 사기를 여러 번 맞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 사기로 집을 잃었을 때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가난한 가족이 왜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지도 알게 됐다..
작가 라문찬의 이름은 레이먼드 챈들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레이먼드 챈들러! 듣자마자 경애의 마음이 들었는데, 라문찬이라니 글쎄,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 골키퍼를 문지기로 바꾼 것처럼 일말의 물음표가 생긴다. 물론 이는 필명이다. 는 90년대 학생운동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추리 소설이다. NL과 PD, 사랑과 우정, 청부살인과 정치, 정경의 유착, 불륜과 팜므파탈까지 알차게 눌러 담았다. 전반적으로 무겁지 않은 이야기가 적당한 긴장과 유머와 함께 술술 풀려나간다. 대한민국 운동권은 크게 NL과 PD로 나눌 수 있다. NL은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들의 앞글자를 따 NLPDR이라 하는데, 그냥 NL로 줄여 부른다. ..
은 우리의 역사를 소설로 극화한 팩션이다. 그냥 역사 소설로 부르면 될 것을 굳이 환담이라 하냐면, 사실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역사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공백이 많다. 빈 부분은 다양한 방법으로 채워야 하는데 퍼즐의 개수도 많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그것을 이야기로 채우나 사실로 채우나, 넓게 보면 그닥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총 3부로 이루어졌다. 1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현장이 그 무대다. '전쟁과 혁명'. 서로 다른 욕망이 부딪쳐 큰 불꽃이 일어나는 시간의 무대를 팩션이 그냥 지나칠 순 없다.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증오를 고백하는 왜장 와키자카. 수나라 병사의 시체를 쌓아 '경관'을 만든 고구려 최종 병기 우이치모테르(을지문덕). 역성혁명을 주장한 정여립과 그의 배후로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두개 다 보고 읽을거라면, 넷플릭스의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온 가족이 뉴욕을 떠나 여름휴가를 간다. 근교, 시골이다.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 완벽한 구성. 완벽한 날씨.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집까지. 누가 이런 집에 사는 걸까? 어떻게 하면 이런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집 뒤엔 숲이 펼쳐지고 근처엔 해변까지 있다. 나무와 바다. 부족하면 집에 돌아와 근사한 수영장을 이용하면 된다. 깊은 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배달은 시킨 적도 없다. 아이들은 잠에 들었고 부부만 거실에 남아있다. 이보다 더 불길한 상황이 있을까? 부부는 얼어붙었다. 피식자의 직감. 무기가 될만한 걸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야구 배트? 클래식하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집에 그런..
레이첼 카슨은 1907년 펜실베이니아주 스프링데일에서 태어났다. 1967년에 태어났어도 죽도록 힘들었을 텐데 1907년이라니,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지 상상이 된다. 지금에야 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혁명 그 자체였다. 화학 산업은 전후 기술 발전의 최대 수혜자였다. 1차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화학전이라는 게 시작됐고 2차 세계대전은 유대인 대학살의 파이널 솔루션으로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 유명한 아스피린의 바이엘과 세계 최대 화학기업 BASF가 바로 독일 전범기업의 후신이다. 미국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전쟁을 통해 혁신한 이 산업들은 국가의 부를 이끄는 선두주자였다. 그들의 제품은 해충을 박멸한 농업의 신이었고 식량 문제를 해결한 기아의 해결사가 되었다. 바야흐로 과학자들..
는 정세랑 최초의 역사 소설이다. 그녀의 책을 적지 않게 읽어온 나로서는 처음엔, 앳된 처자가 어색한 콧수염을 붙이고 갓을 써 남장을 한 것처럼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 설자은도 남장 여자였네? 이 책의 장르는 미스터리, 추리다. 그러나 어떠한 장르도 두 손으로 버무리면 하이퍼 캐주얼로 변모시키는 무적의 정세랑이올시다. 청소년 도서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 가볍고 시원하다. 내 기억에 그녀의 가장 긴 소설은 인데 순수하게 소설 내용으로만 따지면 260p 가량 될 것이다. 설자은은 무려 270p가 넘으니 그야말로 역사적이라 부를만하다. 하지만 정세랑 특유의 인내심 부족은 고작 270p도 안 되는 장편소설을 무려 4개의 에피소드로 쪼개놨다. 안은영도 그랬는데, 역시 정세랑은 긴 글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다...
근 15년 전 단재 신채호의 를(비봉 출판사) 처음 읽었을 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나는 치우천왕에 상당히 빠져있었고, 조선의 역사 배경이 원래는 중국 대륙이었으나 일제강점기와 쑨원의 역사 조작으로 한반도에 이식됐다는 이론을,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니 민족사학자 신채호가 해주는 말들이 얼마나 쏙쏙 가슴에 박혔겠는가! 비판의 눈을 제거하고 보면 는 정말로 대단해 보인다. 특히 신채호의 이두 해석 능력이 그렇다. 지금이야 우리글이 공기처럼 느껴지는 시대니 그 존재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지만 '이두'라는 걸 보고 나면 아, 우리 민족에겐 우리글이 없었구나!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두는 대단히 어렵다. 어떨 때는 한자의 음을, 어떨 때는 한자의 뜻을 취해 우리'말'을 표현한..
후성유전이란 아주 쉽게 말해 당신의 경험이 후세로 유전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솔깃한가? 내가 외운 영단어나 독서로 쌓은 지식, 스쿼트로 만든 30인치 허벅지를 내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후성유전은 이런 방식으로 동작하지는 않는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배아는 이후에 여러 개의 세포로 분열하는데 이 세포들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쌍둥이다. 신기한 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이 세포들이 머리카락, 뇌, 심장 등 완전히 다른 신체 부위를 구성하는 세포로 변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지닌 세포를 우리는 줄기세포라 부른다. 이 줄기세포가 어떻게 구체적 기능을 갖는 세포로 변하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각각의 세포에 대..
대제국 후한이 멸망하고 그 유명한 위촉오의 짧은 삼국시대가 끝난 뒤 중국 대륙은 이른바 5호 16국이라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 난세에는 누구나 왕이 될 수 있었고 그 운명은 채 1~2년이 되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5호 16국은 점차 북위, 북제, 북주로 이어지는 이민족들의 북조와 송, 제, 양, 진으로 이어지는 한족의 남조로 양분되어 남북조 시대를 이루나 혼란의 400년을 마치고 진정한 통일 왕조를 이룩한 건 바로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였다. 그러나 이 수나라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중국의 남과 북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느라 백성의 원성을 샀고 결정적으로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해 국운이 소멸한다. 이 수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또 다른 선비족(오랑캐) 출신인 당고조 이연이었다. 이연은 수나라를 끝내고 ..
무릇 천하는 뭉치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뭉친다는 말은 역사의 고금을 통틀어 늘 진실이었다.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 삼한이 통일되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로써 한반도에 갇히게 됐다. 경상도에 고립된 천년 왕국의 통치자들에겐 그 땅을 나와 반도를 걷는 것만으로도 천하를 가진 듯 가슴이 벅찼겠지만 철기병을 이뤄 벌판을 달리던 사람들은 도저히 같은 마음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다시 세 개로 쪼개져 자웅을 겨루게 된다. 견훤, 왕건, 궁예. 난세는 결국 왕건으로 종결되고 한반도에는 다시 한번 고려라는 통일 왕조가 탄생한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던 나라의 이름이 왜 고려인지는 더 이상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가 곧 고려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고려를 혼용해서 썼던 것 같다..